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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산책길

걷는 걸 무척 좋아한다. 특히 술이 그득하게 취했을 때 더 그렇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만 들릴 때, 혹은 나란히 누군가와 말 없이 걷는 것도 좋다.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걸음에만 집중하고 있는 내가 좋다. 이건, 운동할 때 걷는 것과는 다르다. 다급하게 무언가를 쫓아 걷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여유와 함께 시간을 벗어나 걷는 것 같은 느낌이라 말하고 싶다. 얼마 전 딱 걷기 좋은 산책길을 발견했다. 와룡생태공원?! 듣도 보도 못한 큰 친수공간이 우리 동네에 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남강의 물줄기가 최소한만 정비된 이곳을 끼고 옆으로 흐른다. 몇 번이나 잠겼던 곳이었는지, 내 키의 서너 배나 되는 큰 나무를 따라 덩쿨줄기가 꽈배기를 연상시키듯 꼬여 올라가 있고, 곳곳에 늪지와 생활 쓰레..

오직사유 2020.12.14

좋아하는 가수가 생겼어요.

선우정아란 가수를 처음 알게 된 건 정키 앨범에서였다. 허스키한 보이스만으로 승부를 걸만큼 인상깊은 목소리에 바로 매료됐었다. 그냥, 그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이 가수에게 진짜 빠지게 된 건, 우울증으로 심리적 사경을 헤맸던 9월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된 노래 '도망가자' 때문이었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손 내밀면 내가 잡을게 있을까, 두려울 게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너라서 나는 충분해 나를 봐 눈 맞춰줄래 너의 얼굴 위에 빛이 스며들 때까지 가보자 지금 나랑 도망가자 멀리 안 가도 괜찮을 거야 너와..

지피지기 2020.12.13

인턴의 빈자리

볼 때마다 '나도 20대의 저런 푸릇함이 있었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우리 팀 인턴들이 기간이 인턴 기간이 종료돼 지난 12월 4일부로 그만뒀다. KBS로 이직한 후 내가 참석한 첫 회식 자리가 이 친구들 전에 일했던 인턴들을 떠나보내는 송별회였는데, 나는 그 풍경이 꽤 낯설었다. '인턴들이랑 이렇게 회식을 할 수도 있구나. 도대체 어떤 시간을 함께 보내면 떠나보내는 걸 이토록 아쉬워 하는 걸까?' 내심, 항상 의구심이 들었었는데, 왠 걸. 같이 보낸 다섯 달을 돌이켜보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의미있는 사람들이었다. 6개월 전, 우리 엄마뻘 되는 방송계 선배님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분이 나를 보며 하신 말씀이 뇌리를 스쳤다. "난 이제 지혜씨 만큼의 총기를 잃었어. 그래서 부러워 지혜..

작가세계 2020.12.12

심봤다

"심~봤~~~다~~~~~~!!!!!!" 느닷없는 남편의 환호소리가 쩌렁쩌렁 집안을 울렸다. 드디어! 첫째 시운이가 먹어도 토악질을 하지 않는 영양제를 찾았기 때문이다. 나는 키가 155cm. (여기서 이렇게 신체정보를 밝힐줄이야...) 여태껏 살아오면서 작은 키 때문에 크게 불편한 적은 없었는데, 결혼을 하고서 내 키가 문제가 됐다. (철저히 남편의 시각에서) 흔히 알고 있는 정보 중에 아이들의 키는 부모의 유전에서 70%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 않던가. 추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키는 한쪽 유전자한테서 몽땅 받는다고 한다. 엄마 아빠 키를 더해서 평균치만큼 크는 게 아니라, 엄마한테서 받을 수도 있고, 아빠한테서 받을 수도 있고, 외할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등 오로지 한 사람의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육아전쟁 2020.12.12

위로

예상했던 화요일 퇴원이 무산되면서 막내는 이틀을 더 병원신세를 졌다. 수액이 들어가니까 평소보다 자주 기저귀를 갈아야하는데, 오늘은 저 문구가 눈에 딱 들어오더라. '우리 엄마가 제일 예뻐' 아직 말을 제대로 못하는 막내니까, 저 말은 막내의 엉덩이가 해주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가슴에 살짝 쿵- 하고 와닿았다. 세상에 그 누구도 예쁘다는 말을 싫어할 여자는 없을 테니까. 비좁은 병원 침대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고, 며칠을 제대로 씻지 못한채로 아이 수발을 들어야 하는 병원생활에 잠시나마 위로가 되는 말이었다. 물티슈 뚜껑을 열면 보이는 스티커 위, 그리고 모 마트에서 온 종이봉투의 글귀, 테이크아웃 커피잔 위에 새겨진 말들까지... 엄마가 되고 난 뒤부터 보이는 위로의 말들은 생각보다 많은 곳에 자리하..

오직사유 2020.12.09

서울공화국

서울공화국이란 단어가 국어사전에 등재돼 있다는 사실, 처음 알았다. 인터넷 상에서 자주 쓰는 말 정도인줄만 알았지, 사전에 실릴만큼 비중이 있는지는 이번에 '모노폴리' 관련해서 자료를 수집하면서 알게 됐다. 남동생은 어릴 적부터 명예에 집착하는 아이였다. 자신의 위치도, 배우자의 직업도, 마지막 꿈도 모두 그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서울'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결국, 경찰간부가 되기 위해 신림동 고시촌으로 향했고, 5년의 성과가 물거품이 되자, 일반 순경으로 단계를 낮췄지만 서울에 남겠다고 고집을 피워대는 바람에 아빠와 아직도 갈등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마음을 먹어서인지, 애를 쓰고 기를 써서 강남경찰서에서 근무 중이고, 사는 곳도 강남구 개포동이다. 우리 집 가격보다 비싼 전세금으로 1..

작가세계 2020.12.09

글을 잘 쓰려면?

어느 멋진 글귀를 보면 우와... 감탄부터 하고 보는 나는 이미 하수. 화가 나야 한다. 꼬집혔을 때 아! 하고 소리가 저절로 나는 반사신경처럼 "으악!"하고 짜증이 나는 것이 맞다. 적어도 글쓰는 것에 욕심이 있는 '작가'라면 말이다. 감동... 자체에만 그치니까 발전이 없는 거다. (알면서 왜 그러나?!) 글을 잘 쓰기 위한 고민은 오래전부터 해온 편이다. 하지만 이렇다할 결과물은 없다. 고민만 주구장창 했다는 거다. 어디가서 '작가' 명함을 내밀기도 부끄럽다. 숨고 싶다.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정확히 얘기할 수 있다. 내가 가장 부족한 부분이기도 한, "input이 있어야 output이 있을 수 있다"는 공식! 최근엔 구성안을 쓰면서 확실히 피부로 깨달았는데, 기본적인 자료 수집이 빈약하면 절대로 ..

오직사유 2020.12.09

이곳의 혼돈이...좋아요

은유 작가의 '올드걸의 시집'을 필사 중이다. 참... 진도가 안나간다.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여유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운좋게 생긴, 신나게 놀다 잠이든 막내의 낮잠시간에 얼른 펜을 집어들었다. 은유 작가의 표현 하나하나가 내 맘에 쿵쿵 부딪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밥벌이 작가이며, 30대 후반에 작가일을 시작했고,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는- 꽤나 비슷한 지점이 많기 때문이다. 육아와 일에 치여 삶을 겨우겨우 짊어지고 가는 '우리'를 두고 은유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 주체, 올드걸" '여자', '엄마', 특히 '일하는 엄마'에 대해 일반적인 해석에 그치지 않고, 딱!..

오직사유 2020.12.07

막내는 내 사랑이 또 그리웠나보다

셋째가 처음 입원했을 때가 언제였더라... 암튼 기억은 안나지만 그 때는 분유 먹을 때였는데... 지금은 일반식도 거뜬히 먹어치우는 셋째와의 입원기가 하루 정도는 있어도 될 것 같아서 오늘 글요일은 로 정했다. 수액 주사를 맞히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고 악을 쓰는데, 나혼자로 안되서 간호사 3명이 달라붙었다. "아이구, 엄마가 제대로 못잡네. 이리줘봐요. 내가 안을께요!!" 꼭, 환자가 갑질을 해야한다는 주의는 아닌데, 그렇게 간호사한테 꾸지람을 들으니까 자존심이 약간 상했다. 애가 셋인 엄마가 이것도 못해내냐는 식의 말투였다고 느껴진 건, 정말 기분탓이었을까? 힘이 장사인걸 어뜨케... 얘 때문에 내 왼쪽 손목은 가만히 있어도 통증이 느껴질 정돈데... 병실 앞에서 간호사실까지 ..

육아전쟁 2020.12.05

먼저 선물하세요

나는 원래 그 어떤 것에든 표현이 인색한 사람이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20대 중반 쯤이었나... 어느 날, 베이킹을 잘하는 친한 언니가 날 위해 엄청 맛있는 쿠키를 구워왔다. 그런데 그 쿠기를 먹는 내가 하도 표현이 없어서 정말 큰 오해를 샀다. 누군가가 "어우~ 진짜 맛있다!!!" 라고 하는 게 가장 평범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나는 "음~(맛있군!)" 이 전부였던 거. 저 '음~' 이란 표현에 나는 '맛있고, 고맙고, 언니가 너무 좋다'까지 다 들어있는건데, 표현이 인색한 내 성격이 괜히 문제가 됐다. 그 때 알았다. 요리를 잘하는 친한 언니는 생각보다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이었다는 것을. 근 3개월을 넘게 사이가 서먹했었던 경험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다음부턴 요리를..

지피지기 2020.1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