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뜻밖의 산책길

어진백작 2020. 12. 14. 15:17

제주도 억새밭 같은 우리동네 산책길

 

걷는 걸 무척 좋아한다. 특히 술이 그득하게 취했을 때 더 그렇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만 들릴 때, 혹은 나란히 누군가와 말 없이 걷는 것도 좋다.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그 걸음에만 집중하고 있는 내가 좋다. 

이건, 운동할 때 걷는 것과는 다르다. 다급하게 무언가를 쫓아 걷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의 여유와 함께 시간을 벗어나 걷는 것 같은 느낌이라 말하고 싶다. 

 

얼마 전 딱 걷기 좋은 산책길을 발견했다. 

와룡생태공원?! 

듣도 보도 못한 큰 친수공간이 우리 동네에 있다는 걸 얼마 전에야 알았다. 

 

남강의 물줄기가 최소한만 정비된 이곳을 끼고 옆으로 흐른다. 

몇 번이나 잠겼던 곳이었는지, 내 키의 서너 배나 되는 큰 나무를 따라 덩쿨줄기가 

꽈배기를 연상시키듯 꼬여 올라가 있고, 곳곳에 늪지와 생활 쓰레기들이 널부러져 있다. 

대나무 숲도 꽤 깊게 만들어져 있다. 일부러 심어놓은 것 치곤 수령도 꽤 많이 보인다. 

 

아이들이 킥보드를 타거나 자전거 타기를 연습하는데 최적의 장소다. 

아스팔트가 아니라 시멘트 길로 닦여져 있다. 그 길 양옆으론 억새들도 장관을 이룬다. 

캠핑카들도 많았다. 텐트촌이 만들어지지 않은 이유는 화장실이 없기 때문일거다. 

코로나 거리두기하기엔 최적의 장소인 듯

킥보드를 탄 두 아이들은 신나게 내 앞을 질러 나가 한참을 걸었는데도 보이지 않았다. 

막내는 아직 걸음도 느리고 세상 궁금할 게 많은 나이라 수없이 멈추고 수없이 자연에게 말을 걸었다. 

그냥 두고 돌아서기가 어려웠는지 여러번 "안녕~" 하고 인사도 빠뜨리지 않는다.

제법 걸었는지 다리가 아프다고 "아나두, 아나두" 그런다. 안아달라는 소리다. 

 

아빠는 항상 막내차지다. 내 자리는 없어진지 오래다.

 

좀 더 일찍 발견할 걸, 아쉬운 마음이 크다. 

이제는 너무 추워져서 한낮이 아니고는 걷기가 힘들 정도로 바람이 차가웁다. 

완전 무장을 해야 겨우 30분 걸을 정도다. 

아이들은 추운 줄도 모르고 땀이 날 정도로 뛰어 놀았다. 

신나게 뛰어놀 공간이 얼마 되지 않는 게 너무 슬프다. 

 

혼자 걸어도 좋은 길, 

하지만 보폭들을 맞추고 이름을 부르고 여기 있다 대답하고 기다려주면서 걷는 길은 다른 맛이 있다. 

 

이름을 부를 사람이 있고, 그 부름에 대답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어찌보면 인연을 엮는 세상살이에서 참 어려운 일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 대단한 일을 여러번 해내고 있다는 사실이 괜히 뿌듯해졌다. 

가족과 함께 해서 더없이 좋은 산책이었다. 

 

다음엔 혼자서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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