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상처는 덮지 말고 드러내야 하는 것

어진백작 2020. 12. 15. 01:21

유튜브를 보다가 소통전문가 김창옥 교수의 강연을 보게 됐다. 

늘 재미와 센스가 넘치는 강연으로 정평이 나 있어 평소에도 좋아하는 강연자인데,

오늘 본 '가치들어요' 영상은 기존과는 조금 다른 진행이어서 연달아 두편이나 봤다.    

그냥 강연만 하는게 아니라 사연을 신청한 게스트들도 여럿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모두의 눈물을 쏙 빼게 만든 울산의 한 가장의 이야기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울산 삼산동에서 돈가스 집을 하고 있는 이 분에겐 네명의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2번의 이혼으로 지금은 혼자서 아이들을 모두 키우고 있는 상황.  

그런데 네 명의 아이들 중 둘째 여자아이는 9살임에도 불구하고

2살 지능을 가진, 발달 장애가 있는 아이였다. 

 

엄마, 아빠가 함께 키워도 힘든 네명의 아이를 혼자 키우는 싱글대디. 

게다가 건강이 성치 않은 아이까지... 이 분의 사연을 들은 출연자들은 

이내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고,

어릴적 교통사고를 당해 뇌를 다친 동생을 둔 진행자 김원희는

동생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함께 눈물을 쏟아냈다. 

 

한동안은 동생의 장애를 숨기고만 싶었고, 그렇게 살아오기 바빴는데,

부모님께서 나이를 드셔가면서 기력이 약해지자, 누나 4명이 아픈 동생들을 위해 

한 명씩 그 몫을 해내고 있다는 얘기가 사연자에게 큰 힘이 됐을 것 같다. 

 

어떻게든 잘 키워내겠다는 아빠의 다짐과 진심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라면

분명 힘이 되고 도움을 줄 어른으로 클 거라고...

그러니 지금은 힘들어도 잘 견디셔야 한다고... 

 

김창옥 교수도 얼마 전 자신과 아버지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며 

청각장애를 가진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놨다. 

김원희와 마찬가지로 언제까지고 숨기고 싶은 아픔이었다고, 드러내기 힘든 상처였다고 말이다.  

 

그런 김창옥 교수가 사연자에게 한 말은 이랬다.

"보통 사람들이 숨기려고만 하고 덮으려고만 하는 상처를

사연자께서는 '광장'으로 끌고 나오셨다. 그래서 희망적이다"라고.

 

그리고 이어서 한 말, "상처는 햇볕도 쬐고 바람도 쐐야 딱지가 앉는 법"이니,

바닥 아래에, 곪은 채로 썩혀두지 말고 바깥으로 가지고 나와서 같이 치유해야 한다고 말이다. 

 

 

교과서 같은 이번 강연의 말이 그냥 들리지 않는 것은 나와 남편에게도 비슷한 상황이 있기 때문이다. 

결혼 전까지만 해도 남편 혼자만의 상처였던 것이

결혼을 한 후에는 나도 함께 짊어지고 갈 하나의 숙제로 남았다.

 

남편에게는 지적 장애를 가진 '엄마'가 있고, 우리는 함께 밥을 먹고, 한 집에서 살고 있다.

 

남편을 여윈지 10년이 다 되었지만 아직은 젊은 우리 시어머니는

남편에겐 하나 밖에 없는 핏줄, 그래서 미우나 고우나 챙기고 보듬어가며살아가야 할 존재다. 

 

결혼 전, 남편과 어머니 둘만 살 때는 남편 자신만 입을 다물면 아무도 알 길이 없었던 것이 

자신과는 다르게 사람 좋아하고 외향적이며 너무나 오픈 마인드인 나를 만나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혹시나 자신의 상처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면 어쩌나 입단속을 시켜야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기 보단, 어머니의 부족함과 모자람을 남들에게 들키기 싫어서

많은 사람들을 경계하고 깊이있는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해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태도가 한동안 나는 참 못마땅 했었다. 

시어머니를 보듬고 가야할 내게도 힘들고 버거운 순간이 얼마나 많았겠나.

그럴 때마다 함께 마음의 짐을 나눌만한 가장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은 것이

부부싸움으로 번진 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남편이 진주에 내려와 살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친한 동료에게 털어놓기도 하고, 외식자리에 함께 나가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곪지 않도록 상처를 드러내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인지,

아니면 남편에게도 굳은 살 같은 게 생겨서 울산의 싱글파파처럼 '광장'으로

자신의 문제를 내놓게 된 건지... 잘은 모르겠으나 나름 긍정적인 신호일거라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내게도 역시 더이상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시어머니가 아니다. 

셋째의 등하원은 책임지고 맡아주시는 든든하고 젊은, 시어머니다. 

가끔 아이같이 말도 안되는 떼를 쓴다거나 할 때도 있지만 (그럴 땐 진짜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어떤 말로 다독이고 회유시켜야 하는지 점점 노하우도 쌓이고 있다. 

 

첫째와 둘째는 잘 모르는 할머니를 답답해 하다가,

이제는 잘못된 건 바르게 고쳐서 말해주는 친절한 손자들이 되어주고 있고,

그런 할머니를 가장 잘 따르고 좋아하는 막내는 애교로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터득해가는 우리 가족들이 신기하고 기특하게 여겨지는 밤,

진주에 와서 정말 많이 좋아지신 어머니께

그저 건강해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한 마음을 혼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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