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일 할 수 있는 시간을 줄게.

어진백작 2020. 12. 27. 00:45

하루에도 수십 번 아이들과 밀당을 한다. 가장 쉽게는 '장난감 정리 해~ 칭찬 스티커 하나 붙여준다~!' 로 시작해서 응당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땐, '보고 싶은 유튜브 컨텐츠 2개씩 보여주기!' 로 아이들을 설득시킨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지만 이것마저 안한다면 정상적인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그래왔던 탓일까. 밥을 먹지 않고 사탕부터 뜯어달라고 떼를 쓰는 지운이에게 '아니된다'고 강경하게 대했더니 울고 불고 난리가 났다. 방금 전까지 서로 장난감을 갖고 놀겠다고 피터지게 싸우던 시운이가 사탕을 못 먹어서 훌쩍이고 있는 지운이를 위해 나와의 밀당을 시작했다.

 

"엄마, 이 사탕껍질을 벗겨주면 엄마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줄게."

 

엄마가 사탕껍질을 벗겨주면 너는 지운이를 위해 그 사탕을 가져다 주겠지?! 라고 말하며 단호하게 거절했고, 완강한 내 태도에 고집을 꺾었는지 지운이는 사탕을 포기하고 와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계속 '엄마가 일 할 수 있는 시간을 줄게' 라는 말이 빙빙 맴돌았다.

 

시운이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 중엔 분명 다른 것들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지운이랑 안싸울께 라던지, 마음대로 티비 틀지 않을께 라던지, 그것도 아니면 아빠엄마 말 잘들을께 이런 것들도 있을거다. 그런데, 강력한 한방이라고 생각하고 내민 것이 글쎄 '엄마가 일 할 수 있는 시간을 줄게' 란다. 아... 이걸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출근을 해서 집안 일과 아이에 대한 걱정을 잊을 수만 있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 자가격리로 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나는 내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을 밀치고 노트북을 켠다. 전화 통화는 수시로 이뤄지고 가편된 영상을 기록하는 시간엔 심지어 귀에 이어폰을 끼고 한 장면, 자막 하나도 놓치지 않는 집중을 해야한다. 그러는 사이 시운이와 지운이는 싸우고, 채운이는 저지레로 난장판을 만든다. 다행히 지금은 남편이 함께 집에 있어서 그럴 일은 줄었다.

 

시운이가 저 말을 내세운 이유는 자신이 생각할 때 엄마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시간임을 알고 있다는 거 아닐까. 게다가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절대 일할 시간을 안내어주는 것으로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것임을 선전포고 하는 것 아니고 뭐겠나. 결국, 시운이는 엄마가 일하는 시간이 엄마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거다. 아직은 어린 나이라 생각나는대로 아무말이나 했을 수 있으므로 짐작만으로 그 어떤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냥 넘길만한 '말'도 아니다. 

 

시운이에게 여러 번 얘기했다. "엄마가 일을 하는 건, 가장 엄마답게 살고 싶기 때문이야. 지금은 엄마가 일하는 게 못마땅해도 시운이가 나중에 크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 거라 생각해. 엄만 시운이가 엄마 일을 응원해줬으면 좋겠어." 라고. 엄마 촬영장에도 데리고 가고, 엄마랑 일하는 아저씨 아줌마도 보여주고, 엄마가 만든 유튜브도 보여주면서 다양한 경로로 엄마가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려 노력했다.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저리 나오니 또 한 숨이 절로 난다. 

 

얼마 전, 수희님의 글에서 '욕망'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내가 가진 '욕망'에 대해 이렇게 답글을 적었다. 

 

-나의 욕망은 '내 삶의 주인공은 나다!'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엄마도, 남편을 위한 아내도, 부모님을 위한 자식도 아닌 온전한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요. 해야할 역할을 회피하는 건 아니지만, 그 어느 역할보다 내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라고. 

 

내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과정에서 다양한 모습의 내가 드러날 것이고, 그런 모습들이 모여 더 단단한 내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기에 자신한다. 하지 말라고 뜯어말려도 스스로 내가 그만두지 않는 이상 멈출 일은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일'을 몹시 아낀다. 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소중하다. 그래서 그 소중한 시간을 빌미로 거래를 요구하는 시운이가 두렵다. 좀 더 크고 나면, 좀 더 구체적으로 밀당을 해 올 것 같다. 예를 들면....

 

"엄마는 내가 중요해? 엄마 일이 중요해?"

 

라고 질문을 해 오면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육아 고수님들 계시면 팁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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