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이곳의 혼돈이...좋아요

어진백작 2020. 12. 7. 00:32

아이 낮잠시간, 그 꿀같은 휴식에 '필사'

 

은유 작가의 '올드걸의 시집'을 필사 중이다. 참... 진도가 안나간다.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여유가 쉽게 생기지 않는다. 운좋게 생긴,

신나게 놀다 잠이든 막내의 낮잠시간에 얼른 펜을 집어들었다. 

 

은유 작가의 표현 하나하나가 내 맘에 쿵쿵 부딪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밥벌이 작가이며, 30대 후반에 작가일을 시작했고, 육아와 살림을 도맡아 하는- 

꽤나 비슷한 지점이 많기 때문이다. 

 

육아와 일에 치여 삶을 겨우겨우 짊어지고 가는 '우리'를 두고 은유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돈이나 권력, 자식을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고

본래적 자아를 동력으로 살아가는 존재, 

늘 느끼고 회의하고 배우는 감수성 주체, 올드걸"

 

'여자', '엄마', 특히 '일하는 엄마'에 대해 일반적인 해석에 그치지 않고, 

딱! 내가 공감하고 지향하고 있는 주체를 언급해 준 것에 감사함까지 느꼈다.

 그리고 글을 쓰게 된 동기 역시, 참 맛깔나게 적어놨다. 

 

아이들이 먹을 밥을 차리는데 자꾸 한숨이 나는 내가 미워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다. 

아이들용으로 손이 가는 반찬을 해 놓았을 때

그걸 먹는 남편이 미운 내가 싫어서 쓰기 시작한 글들이다. 

 

오늘 필사한 부분은 내가 책을 읽고 가장 많이 공감한 글이다.

(다 읽고 필사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중이다)

 

'자기만의 방이 없는 내게 거실은 주 무대였고 식탁은 작업대였다. 

원형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거액을 주고 장만한 오래된 식탁. 

거기서 아침 먹고 그릇 치우고, 책보고 점심 먹고, 김칫국물 닦고 글 썼다. 

........(중략).........

둥근 모서리에 배를 붙이고 앉아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이유식을 먹였던 그곳에서,

나 역시 더운 밥덩이를 넘기고 매운 책뭉치를 삼키고 비린 언어들을 게웠다. 

일명 생계형 글쓰기. 밥상에서 밥을 위한 글을 쓰면서 나는 밥의 절실함과 서러움을 배웠다'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 라는 제목의 글에선,

 

'결혼은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는 일 (율리히 벡) 이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바람은 오직 한 가지. 내 눈앞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면 했다. 

이혼이 목적이라기보다 독립이 화두였다. 남편과 자식까지,

내 몸보다 큰 배낭 세 개쯤 짊어지고 사는 그 지겨운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 애가 끓었다.'

 

오우. 자신의 일상을 담은 글들이라 그런지, 당시의 고뇌가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 있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쾌감 같은 것들을 마구마구 던져주는...

간지러운 곳에 손이 안닿아서 참 찜찜한 참이었는데,

아예 효자손을 내 손에다 쥐어주고 박박 긁어주는 아주 고마운 글들이 넘치도록 담겨있다. 

 

물론, 이런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르포작가'답게 사회 문제와 생각해봐야 할 시사점도 던져준다.

특히 이 책은 은유 작가가 좋아하는 시의 문구들도 매 편마다 실려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 문장들을 보면 안다. 

 

'생이 기울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 보시기,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 있었따. 남편과 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TV는 저 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30분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시도 읽고, 그 시를 떠올리며 적은 은유 작가의 이야기도 읽고,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를 떠올리고, 나를 떠올리며 내 생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도 고민해본다. 

그 시간이 즐겁고 뜻깊다 못해 가슴 속에 너무 사무쳤다.

 

은유 같은 작가가 될 수 있으면 더 바랄게 없겠다. 

갈길이 너무 멀다.

 

 

P.S 이런 작가를 알게해 준 승훈 샘께 늦었지만, 진즉에 했어야 했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여기서? 갑자기?!ㅋㅋ) '글쓰기의 최전선'을 몰랐으면, 그리고 승훈 샘 페북을 타고  

은유 작가의 페북을 들어가지 않았으면 못 만나고 지나쳤을, 대단히 행운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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