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먼저 선물하세요

어진백작 2020. 12. 4. 22:32

팀원들한테 선물한 순우리말 탁상달력

 

나는 원래 그 어떤 것에든 표현이 인색한 사람이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20대 중반 쯤이었나... 어느 날, 베이킹을 잘하는 친한 언니가 날 위해 엄청 맛있는 쿠키를 구워왔다. 

그런데 그 쿠기를 먹는 내가 하도 표현이 없어서 정말 큰 오해를 샀다. 

누군가가 "어우~ 진짜 맛있다!!!" 라고 하는 게 가장 평범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나는 "음~(맛있군!)" 이 전부였던 거.

저 '음~' 이란 표현에 나는 '맛있고, 고맙고, 언니가 너무 좋다'까지 다 들어있는건데,

표현이 인색한 내 성격이 괜히 문제가 됐다. 

그 때 알았다. 요리를 잘하는 친한 언니는 생각보다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이었다는 것을. 

근 3개월을 넘게 사이가 서먹했었던 경험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다음부턴 요리를 잘하는 친한 언니 앞에선 무조건 300% 과잉된 표현을 연출했다. 힘들었다.) 

 

속으로 반응하는 편이지, 겉으로 내 생각을 어필하기 위해 인상적인 표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 힘든 일이었다. 적어도 그 때는 그랬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얘기지만. 

 

'엄마'라는 사람이 되기 전, 나는 선물 같은 것도 하나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면 꼭 그런 사람들이 있지 않나.

뭐든 나눠주는 사람. 뭐든 챙겨주는 사람. 뭐든 먼저 주는 사람.(한정희 소담샘이 대표적!)

그런 사람들한테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늘 뒤늣게 후회했다.

'아차! 내가 또 한 발 늦었네...'

 

그런데 그런 내가 차츰 달라지고 있다. 

예전엔 집에서 챙겨나온 사탕이 두 개가 있으면 그 두 개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 것이었다. 

그런데 이젠, 사탕을 10개를 집어서 나온다. 그래서 8개는 먼저 나눠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중이다. 

 

 

최근엔 SNS를 둘러보다 아기자기한 탁상달력을 발견하곤

연말연시 팀원들을 위한 선물로 6개를 마련했다. 

우드 받침대에 새길 10자 내외의 문구들도 이틀 정도 고민해서 주문했고, 기다리는 동안 한참을 설렜다.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팀원들만 봐도 참, 뿌듯했다. 그리고 덩달아 신이났다. 

각자의 책상 위에 적어도 1년동안은 내가 선물한 달력이 놓여져 있을테니까. 

 

팀장한테 준 문구가 압권이다. "이 미친세상에 정답은 너야" 

(지난 회식 때 술 취한 팀장이 자꾸 "나는 도라이예요" 라고 하는 말에 착안함)

 

돌아올 것을 생각하고 건네는 것이 아니라,

뭐든 나부터 나눠주다 보면 언젠간 좋은 일로 돌아오겠지. 

꼭 돌아오지 않아도 돼. 주는 것에 대한 기쁨을 충분히 만끽했으니깐. 

 

그런데. 

탁상달력이 꽤 예뻐서, 내것도 같이 주문할 걸... 하고 아쉬워하던 그날 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이 도착했다.

 

수현이가 보내온 다이어리 

 

들꽃 중에 날 닮은 꽃으로 물망초 다이어리를 보내왔다. 

 

먼저 베풀면 어떻게든 돌아온다는 얘기가 딱 들어맞는 날이었다. 

감동. 소오름. 데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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