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놓을 수 없는 꿈

어진백작 2020. 12. 23. 02:02

오프닝 샘플

 

평소 내게 소소한 알바거리를 던져 주시는 시사평론가 한 분이 계신데, 어느 날은 다른 공고 하나를 툭 하고 던져 주시는 거다. 진주 KBS 라디오 진행자 모집 공고. 시간도 오전 11시. 매일 50분 진행. 방송국이 무려 '진주'. TBN 전설같은 MC, 김혜란 선배와 만났던 자리에서 내꿈에 대한 얘기를 기억하셨는지, '백작가님께 딱이네유' 라는 한 마디와 함께 정말 넝쿨째 들어온 진행자 공고였다. 

 

나는 원래 말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10년을 마이크를 잡았고 그 마이크를 통해 사람들과 소통을 했고 마이크로 녹음해 내 귀로 다시 들리는, 그런 내 목소리를 아끼고 사랑하던 사람이었다. 지금도 평생 내 이름을 건 프로그램 진행 한 번 해보는 것이 최종 목표이고 꿈임에는 변함이 없다. 

 

작가를 시작한 것도 어떻게든 방송국 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으면 진행자로서의 기회가 다가오진 않을까에서 였다. 그래서 그 갖은 수모를 겪어가며 2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그런데 MBC가 유독 환경이 좋지 않아서였을까. 내가 바란 자리는 쉽게 생기지 않았다.

 

뜬금없이 알게된 이 공고를 보면서 나는 선뜻 지원이 망설여졌다. 그 이유는 지금 하고 있는 유튜브제작 관련 일이 너무재미있고, 라디오보다 좀 더 폭넓고 재미있는 시사 상식을 영상으로 담아내는 이 분야의 매력에 단단히 빠져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도 좋다. 6개월동안 이 사람들 마음 속에도 이젠 자리를 잡은 듯 단단한 연결고리가 느껴지고 있는 참이었다. 

 

모집 공고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 내 모습을 보고, 메인작가가 넌지시 물어왔다.

 

"지혜씨, 그거 뭐야?"

"아, 이거요? 이런 공고가 떴네요... 진주 KBS 라디오 진행자라는데?"

"그래?!?!??! 진짜 대박이네. 그럼 넣어야지!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아니 나는 여기가 좋아서..."

"야, 니 바보가! 당연히 넣어야지!!!"

"왜?! 나는 여기가 좋은데?! 작가님. 내가 여기 있는게 싫어요?"

"그게 아니라~ 좋은 기회니까 그렇지. 지혜씨 진행자 하고 싶어 하잖아. 목소리 욕심 있는 사람 아니었어?"

"있죠. 맞죠..."

"일단 넣어. 되고 나서 생각해봐. 여긴 안전빵이라 생각하고 좋은 자리는 무조건 넣는 거야. 으휴. 저 바보."

 

'그래. 뭐. 넣는 거야 어려워?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데 넣어보지 뭐.' 하고 지난 주 수요일에 원서를 넣었다. 마감일이 금요일까지였는데 주말에 한 번 검색해보니까 와우! 89명이나 지원을 했더라 글쎄. 프리랜서 진행자 자리에 이렇게 사람이 몰리는 건 처음 봤다. 취업이 쉽지 않은 요즘이라 그런가... 그럼 간절한 마음으로 지원한 사람들도 많을텐데... '그냥 한 번?' 이란 마음으로 지원한 내가 조금은 부끄러웠다. 에이 저 많은 사람 중에 설마... '서류전형 붙으면 다행이다' 라고만 생각하고 잊고 있었던 어제. 저녁 8시 40분이 넘어서 모르는 번호로 문자 하나가 전송됐다. 메일을 확인해보라는 진주KBS 채용 관계자 연락이었다. 89명에서 15명으로 추려진 1차 합격자들에게 샘플로 오프닝 원고가 하나 보내졌고, 이것을 녹음해 전송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코로나가 워낙 심각해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방송국으로 들이기가 부담이 됐다면서 양해를 구했다. 기한은 다음날(오늘) 오후 5시까지였다.

 

애들은 잠이 들었지만 내일 오후 5시까지라면 시간은 지금 뿐인데?! 밤 10시가 넘어서 오전 11시 프로 오프닝 느낌을 살릴려니 굉장히 난감했다. 게다가 원고를 제대로 읽은 지가 언제였더라. 내맘대로 사투리 팍팍 써가며 편하게 말하는데 익숙해진 요즘인데. 아이고. 읽고 또 읽고. 모니터만 보고 읽으니까 느낌이 안살아서 인쇄해서 장단음 체크하고 내 입맛에 맞게 원고도 수정하고. 부시럭부시럭. 열댓 번은 더 녹음하다가 이러다간 목이 쉬어서 완성도 안될 것 같아 적당히 괜찮은 수준으로(완벽한 수준이 아닌) 마무리를 하고 전송해 버렸다. 

 

녹음된 내 목소리를 들으니 가라앉았던 지난 날의 쾌감이 느껴졌다. 말을 하는 직업에서 이제는 글을 쓰는 직업으로 전환했음에도 이렇게 다시 살아 숨쉬는 걸 확인하니까 욕심이 났다. 자꾸 욕심부리니까 왠지 될 것도 같다. 왜냐하면 해당 프로는 주부들을 위한 프로그램이고 (나는 영락없는 아줌마), 게다가 방송국이 진주에 있고(실거주지가 진주시 금산면), 시간도 너무나 적당해서(매일 11시 대박). 방송국 입장에서도 타지에 사는 젊은이 채용해서 생활비 조로 페이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려면 진주에 사는 아줌마가 제 격 아닐까?라고 마구마구 허공에 던져 봄. 

 

어쨌든 주사위는 굴려졌고. 나는 그 결과만 기다리면 된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되면 좋겠다.

 

만약 합격하게 된다면?!

1. 도로에 돈 뿌리고 다니지 않아서 좋고,

2. 애들 걱정 멀리서 하지 않아 좋고,

3. 지금 KBS 창원에서 받는 돈보다 더 많이 받아서 좋고.   

 

떨어져도?!

1. 진주 KBS에 내 인력 정보가 있으니, 급할 때 연락이 올 수도 있음.

2. 지금 직장에 크게 불만없음. (나만 그러함. 남편은 아직도 속으로 반대중...)

3. 작가 경력 쌓기에 훌륭한 선배가 있음. 

4. 간만에 좋은 경험이었다. 

 

는 걸로 급마무리. 그나저나 2주는 언제 끝나나?! 이제 겨우 이틀지났네.....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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