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가족문화

어진백작 2021. 1. 3. 02:56

엄마와 남동생이 오랜만에 우리 집에 왔다. 동생은 신경써서 고른 와인 두 병과 조카들을 위한 선물을 들고, 그리고 아들과 함께한 하루가 아쉬워 부산에서 쫓아온 엄마까지. 그나마 대화가 즐거운 네 사람이 한 자리에 모였다. 남편은 두 사람을 대접하기 위해 거한 상차림에 정성을 기울이고, 나는 서둘러 청소를 마쳤다.  

 

하지만 남동생은 반갑지 않은 소식까지 가지고 왔다.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아 이혼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혼을 한 지 3년째.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아이도 만들려고 하지 않는 동생을 알고 있어서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지만, 남편은 엄마 앞에서 그런 얘기를 서슴없이 꺼내는 남동생을 꽤 불편해 했다. 어쩜 그런 걱정거리를 부모님도 아시게 하는거냐가 관련이었다. 게다가 엄마는 이미 알고 있었다며 아무렇지 않게 동생의 고민을 대화로 이어갔고, 이렇게 돌아가는 게 진짜 맞는 건가?! 적응이 안되는 듯한 남편은 표정이 복잡해보였다. 자신을 제외한 우리 셋과의 대화가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는 내색을 어색한 웃음으로 드러냈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가 평범한 사랑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려서 평범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결혼을 하고, 결혼 생활을 해 나가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나와 내 남편은 실패한 케이스다. 이 대화에 자연스럽게 동화되지 못하는 남편이 그 증거다. 

 

우리 가족은 어릴 적부터 스스럼 없이 솔직한 자신의 감정들을 공유해왔다. 어디서부터 훈련이 됐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자신의 처지를, 혹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엄마가 그 시작일거다. 부모로서의 권위보다는 자식과 친구로 지내고픈 마음과 사실 자식들 말고는 딱히 다른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엄마는 늘 우리와 대화를 하려 했고, 거기에 조금씩 동화가 된 것 같다.

 

아빠는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못했다. 솔직함을 드러내는 순간, 아빠가 세워놓은 도덕적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늘 부정하고 강요하는 자세로 가족들을 대했기 때문이다.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어느 순간부터 아빠는 철저히 배제됐고, 사실 엄마에게도 100% 진실을 알리지 않은 적이 많다. 동생과 나는 동생의 문제를 오래전부터 논의해왔다. 

 

자신의 이혼 문제를 누나에게 상의하고 때론 다른 이성의 존재를 서슴없이 전하는 동생의 태도에 남편은 처음부터 적응하지 못했다. 동생이 한 번 다녀가면 남편은 어렵사리 진심을 꺼낸다. 어쩜 이런 대화들을 남매끼리 스스럼 없이 주고 받을 수 있냐고. 자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라며 오히려 우리를 이상한 집단으로 몰아간다. 우리 가족끼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대화가 전혀 다른 가족 문화를 가지고 살아온 남편에겐 너무나 이상한 대화가 된다는 사실에 적당히 수긍이 되면서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말끝마다 "어쩜 그럴 수 있어?" 라는 물음에 알맞은 대답을 할 수 없어 난감할 때가 많았다.

 

이상한게 아니고 틀린게 아니라 '다른 거'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를 보면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강요할 수 없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수긍하지 못하는 저 사람이 나는 왜 이렇게 섭섭한 거지?! 이 섭섭함까지 내려 놓아야 우리 사이에 평화가 온다면... 기꺼이 그래야지. 동생의 상황을 더 이상 전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일정 사실을 숨겨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가족 문화가 비슷한 사람이 만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나는 결혼에 더 신중했을 거다. 그 사람의 매력에만 빠져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안일한 선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 말씀에 더 귀 기울이고 그들의 혜안으로 바라봤을 때 괜찮은 사람을 배우자로 맞이했을 거란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니 남편의 저런 반응은 감수해야 한다.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세까지 감수하고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가족만의 문화를 잘 만들어 나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드라마 <청춘기록>에서 갈등이 생길 때마다 가족회의를 하는 그런 가정을 만들고 싶은데, 속내를 드러내기 어려워하는 남편이 과연 그걸 받아들일까... 순간 고민이 된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서툰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무 솔직한 나를 부담스러워 하는 이 사람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아이들은 우리에게 앞으로 어디까지 솔직해질까. 생각이 많은 밤이다.  

 

 

# 참고로 오늘 쓴 글은 와인 2병을 나눠 마신 채 술김에 쓰는 글입니다. 너그러운 양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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