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궤변일까, 핑계일까

어진백작 2022. 2. 3. 23:34
이게 이래뵈도 사진 작가님 작품이라는거- 모델인 내가 좀 미안해지는 샷 (장소: 남해 섬이정원)


무언가를 써야 하는데, 일적인 얘기를 하려면... 그게 그래도 뭔가, 내게 해가 될 것 같아서 그만두길 여러 번. 제대로 된 사유를 하지 않은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인 투 식스 패턴이 주는 폐해기도 하지만, 또 복잡한 생각따위 접어 두는 것도 때론(내 정신 건강을 위한)지혜로운 사고방식이라 스스로를 위무하며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꽤 묵직한 충격 하나를 받았다 고백한다.

에세이를 함께 쓰던 지인과의 대화에서 툭- 하고 나온 얘기다.

"내가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은 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 이래요. 첫째, 내 인생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용기가 없었고요. 둘째, 망해가는 지구에, 황폐해져 가는 이 세상에 내 2세를 등떠밀고 싶지 않았어요. 그건 참, 책임감 없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일리있는 얘기였다.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고, 관념이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사상에서 비롯된 말. 인정하고 동의한다. 그런데 인정하는 동시에 나는 책임감없이 무턱대고 아이 셋을 낳은 철딱서니 없는 사람으로 비쳐져 마음이 불편했다. 계획에 없던 셋째가 세상에 나왔고, 아이만 낳았지, 망가져 가는 지구를 위해 딱히 이렇다할 노력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껏해봐야 제로웨이스트를 지향하는 제품을 구매할 뿐이었다. 남들이 다 하는 분리수거 조금, 그게 전부라는 생각이 드니까 내가 너무 초라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거다.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못 되고, 눈앞에 닥쳐진 내 삶을 근근히 유지하고만 있는 못난이.

이게 이렇게 자책할 일인가 싶다가도 지인이 한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한동안 좀 다운됐었다.

내 편의를 위해 하루 140km를 자가용으로 달리고, 텀블러를 들고 나오지 못한 날인데 기어코 커피 한잔을 테이크아웃한다. 컴퓨터 전원 스위치를 OFF로 해놓거나 불필요한 메일을 정리하지도 않는, '환경'에 무심하고 무감각한 현대인. 그런 사람이 어쩌자고 애를 셋이나 낳아서 우리 아이들이 겪어야 할 고통에 짐을 더 얹어주고 있는 건지.

휴우. 비건을 해야 하는데,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이지 않으면 안되지 않나?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고,
제로웨이스트에 더 적극 참여하는데 하루에 여유시간이(살림할 수 있는 시간이) 고작 두시간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것까지 어떻게 해? 라며 거부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야 하는데, 여섯식구의 식사량을 찰떡같이 맞출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어떻게 겸비하지? 의문을 가지고 있다-

궤변일까, 핑계일까?! 결론나지 않는,
오랜만에 씁쓸한 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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