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오르막길

어진백작 2021. 9. 2. 05:13


8월의 끝자락에 태어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여름을 참 싫어한다. 오늘도 분리수거를 하러 다녀오면서 모기한테 2방이나 물렸다. 계속해서 더워진다고 하는데 벌레 많고, 더위에 약해진 내가 견딜 수 있는 여름은 앞으로도 쭉 없을 것 같다.

생일이 지난달 28일 토요일이었는데, 남편은 하필 금토일 야간 근무까지 해야했다. 물론 독박육아는 자신 없었고, 번아웃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왔다갔다 하는 요즘이 과연 체력의 한계인지 아니면 의지의 문제인지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가 됐다. 그렇게 아주아주 정신이 쇠약해져있는 상태에서 나는, 서른 아홉번째 생일을 맞았다.

아직은 케이크에 꽂힌 촛불 끄기에만 신나하는 애들이라, 뭐- 엄마 선물이야 기대하지 않았지만 나의 생일은 무척이나 소중하므로! 남편한테 받을 선물로 당당히 생일쿠폰, 일명 공식적인 외박권을 쓰기로 한다.

인천에 사는 내 단짝친구 수현이와 여수여행. 벌써 렌트카도 좋은 차로 고르고, 에어비앤비도 차분하고 조용한 곳으로 예약했다. 맛집은 뒷전, 우린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에 집중하고 싶어서 원데이클래스로 '우정링' 제작을 추진했다. 이 못난 몸뚱아리에 뭘 걸치든 내 손에 하나, 쟤 손에 하나, 그 의미가 대단한거니까.


어느새 4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니,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 달력을 보고 또 보고... 숫자가 뭔 대수야? 마음만 청춘이면 되지! 라는 식상한 말들도 이젠 위로가 안되는 나이. 남들도 다 겪는 건데, 나만 유독 이렇게 조바심을 내는 건지, 욕심을 내는 건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도전이면 도전, 모험이면 모험, 두려움 없이 앞으로 전진밖에 모르던 백지혜가 당장 '나이' 앞에선 주저하는 모습이 낯설다. 언젠가는 가야할 길이고,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되어 맞닥들이면 될터인데, 목줄에 메인 강아지 처럼 끌려가기 싫어서 발버둥치는 꼴이 우습다 못해 처참하다. 젊게 살고 싶다고 해서 누구든 쉽게 마음 먹을 수 있는 다짐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행복하게 보낸 생일주간이었다. 저 멀리 동탄에서 4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운전해 와서 아이들을 봐주고 재미있게 놀아준 우리 에블린, 그리고 생일 때만은 덜 힘들게 해주고 싶어 찾아온 친정엄마까지 든든한 두 사람 덕분에 행복했다. 하루종일 생일축하 문자를 받느라 내 휴대폰은 쉴 줄을 몰랐고, 축하 인사도 감지덕지한데 선물까지 보내줘서 너무너무 고마웠다. 그래, 이만하면 잘 산거지. 겨우겨우 위로를 하고 토닥이며 보냈던 요 며칠. 아이들의 생일축하노래까지 더해지니 아주 시끄러운데 그게 또 나름 뿌듯하기도 했더랬다.

사실, 시끌벅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8월 초 응시원서를 넣었던 곳의 1차 발표가 곧 날거라 어떻게든 정신없이 지내려 애썼다.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너무 힘들게 서류를 준비했고, 그만큼 성과가 꼭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터라 발표일까지 기다리는게 진짜 힘들었는데...

어제 오전,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다. 공식 발표는 나지 않았지만 면접일이 너무 긴박해서 미리 전화드린다고. 2차 면접준비 잘 해서 오시라는 말과 함께. 어휴. 다행이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생일 주간이 와서 겨우, 그리고 기적같은 서류통과 소식이 또 겨우, 조금씩 나를 살려낸다. 그리고 말한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암, 그렇고 말고.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도 있다는 순리를 좋아한다. 힘든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반드시 따라온다는 얘기를 믿고 싶어졌다. 치열하게 살았으니, 곧 선선한 바람을 맞을 날도 오겠지~ 그러니까 살자. 곧 내 세상이 올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