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을 두 달치나 주지 않는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든다. 일곱살 같은 우리 시어머니의 이야기다.
어제, 남편과 투닥투닥 말다툼이 있었는데, 목소리가 좀 크게 나왔다. 덥고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누구하나 뭐 잘한 것 없는 그런 싸움정도였다. 그런데 그 일을 곱씹으며 화가 나셨는지 주방으로 나와 아침 댓바람부터 쏘아대시는 거다.
"니가 남편 밥 한 번 제대로 차려준 적이 있냐? 뭘 잘했다고 싸우길 싸워?"
제대로 시비를 걸어오셨다. 너무나 격앙된 목소리, 흔들리는 눈빛, 그러면서도 정확한 손가락질로 나를 몰아세웠다. 순수할 땐 세상 걱정 하나 없는 소녀처럼 굴다가도 극한에 몰리면 막장 드라마 저리가라 할 정도의 욕받이 국민 시어머니로 변신한다.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극과 극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가는 분이 바로 우리 시어머니시다.
"내가 어? 너한테 불만이 아주 많아. 어디 지 새끼들 밥만 챙겨주고 말이야. 남편 밥은 나몰라라야? 어? 니가 곱게 자라면 자랐지 누가 여기서도 그러래? 니가 내 밥을 한 번 제대로 챙겨준 적이 있냐, 용돈은 왜 두달이 넘도록 안줘? 어?"
결국, 용돈 때문이다. 어머님은 수중에 돈이 없으시면 불안하고 기분이 나빠진다. 아들이랑 싸우다가 집을 나가기도 여러 번. 항암치료 하실 땐 정말... 휴. 겁도 없이 그냥, 맨몸으로 그냥 나가신다.
용돈을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금을 못드릴 뿐. 상시 쓰실 수 있는 카드는 늘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현금을 주지 않는다고 용돈을 주지 않는다 말하시는 것. 카드는 카드대로 쓰시면서 현금도 늘 가지고 다녀야 한다는 논리다.
이번엔 화가 제법 나셨다. 내가 듣다듣다 애들도 있고 그래서 "어머니, 그만 좀 하세요." 점잖게 얘기했더니, 냅다 욕을 하기 시작하셨다.
"어디서 지랄같고 개똥 같은 며느리가 들어와서는 순진한 OO이 꼬셔가지고 망쳐놨어 아주! 남편 밥도 안차려주는 게 뭐 잘났다고 XXXXXXXXXXXXX"
시운이와 채운이가 보고 있었다. 더는 대응할 수가 없었는데 나도 화가 났다. 대화가 되지 않는 싸움에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은 좀 심했다. 보온 물통에 물을 담으면서 얘기하고 계셨는데, 한 대 칠 기세셨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고, 밥 잘해주는 며느리 새로 들이라고 소리를 냅다 질러버렸다.
아이들 밥을 차려주는 것도 일이다. 차려줘서 곱게 먹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안먹는다는 걸 억지로 달래고 윽박지르면서 먹이고 나면 내 숟가락 들 힘도 없어진다. 그런 아이들이 셋이나 된다. 만들어지는대로 식탁에 놓고, 되는대로 먹이고 나면 넉다운. 사실 그러면 안되지만, 내 밥 뜰 시간도 없는데 남편밥 시엄니 밥은 무슨. 지금껏, 합가하고 5년이 넘는 시간동안 각자 뜨고 각자 자리에 앉아왔다. 오히려 잘 도와주셨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날벼락이 쳤던 거다.
문제는 용돈이다. 현금이다. 안주고 못주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머니에겐 '결핍'의 문제다. 지네들은 바쁘고 재미나게 사는 것 같은데, 자신에겐 결정권도 없고 친구도 없고 남편도 없고 사는 게 재미도 없다. 심술이다. 맘껏 쓸 수 있는 현금이라도 넉넉하게 있는 것이 그나마 행복이라면 행복인 정도.
안다. 다 안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가 채워줄 수가 없다. 남편이 채워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늘 제멋대로, 하고 싶은대로만 하고 사시는 분이 건수를 제대로 잡으셨다. 남편 밥 안차려주는 천하의 못된 며느리로 만드는 것이 속이나마 편하셨던 거다. 나는 그렇게 이해할란다.
마음이 아픈 사람이라 이해하기엔 내가 들은 말들이 너무 생생해서 괴롭다. 사랑하는 남자의 어머니라서 이해하기엔 요즘 저 남자가 자꾸 싫은 짓만 골라한다. 어디까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확실하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했는데, 이렇게 한 번씩 갈 길을 잃은 고양이 마냥 허허들판에 덩그러니 놓여진 기분이다.
얼마 전 어머님이 욱한 나머지 남편에게도 "죽어라, 술먹고 빨리 죽어버려라!" 하고 소리를 지르셨다. 나를 낳은 엄마한테 그런 소리를 들은 남편은 오죽할까 싶어 수위를 낮춰 오늘의 사건을 전달했다. 이해를 구한다는 메시지가 도착했지만 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이자 반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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