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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컨텐츠진흥원 평가위원

어진백작 2021. 5. 25. 06:38

한국컨텐츠진흥원 홍릉 분원 콘텐츠인재양성캠퍼스 3층 세미나실 앞

 

한국컨텐츠진흥원 평가위원으로 선정된 건, 지난 1월 말이었다. 평가위원으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고 첫 반응은, 

 

'어?! 진짜? 내가????'

 

평가위원 자격 기준을 보면, 해당 전공분야에서 10년 이상의 경력이 필수라고 했는데, 리포터 시절 방송 제작 경험까지 포함하면 음, 10년은 훌쩍 넘으니까. 지금 돌이켜보면 예능 프로가 아니라 시사 프로그램 제작만 도맡았던 것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가위원이 되고 첫 연락은 4월 초에 왔다. 하필 29일 이삿날이어서 광화문까지 오라는 연락에는 응하지 못했다. 아, 전국단위의 평가니까 맞네. 앞으로 오는 연락도 대부분이 서울이겠다, 싶어 약간 설렜다. 어찌됐든 '집'을 떠나는 거라 마냥 좋아서ㅋㅋㅋㅋㅋㅋㅋ

 

두번째 연락이 최근에 왔고, 남편에게 양해를 구한 뒤 나는 서울로 향했다.

심사는 2021년 방송영상컨텐츠 기획안 공모사업 다큐멘터리 부문.

 

 

 

 

예전에 부산시 시설관리공단에서 진행한 홍보영상 업체 선정 심사에는 온라인 평가로 심사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직접 한국컨텐츠진흥원으로 올라가야 했다. 본사는 나주에 있는데, 이번엔 홍릉 분원에서 열렸다. 새벽 5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가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세미나 실에 갇혀서 기획안들을 눈이 빠져라 봤다. 1차 서면평가를 통과한 총 31개 기획안을 검토하고 점수를 매기는 작업이었는데, 와우ㅠ 1~2장 짜리 기획안이 아니라, 많게는 서른 장이 넘는 기획안도 있어서 결국, 혹시나 하고 챙겨간 안경을 꺼낼 수 밖에 없었다. 6시간을 모니터로 확인하는 작업이... 옴뫄야. 

 

나를 제외한 그날의 다른 평가위원들은 막.. 어디 프로덕션 부대표고 어느 회사 대표고... 교수고. 딱 첫 머리만 봐도 각이 서는 평가위원들이었다면, 나는 평가위원으로선 초짜라 진짜 토시 하나 안 빼먹고 구석구석 보느라 더 힘이 들었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정성 100%였다고 자부함) 

 

게다가 2021년 대한민국 방송영상콘텐츠는 중소방송영상제작사를 대상으로 지원하고, 드라마 예능, 교양, 다큐까지 규모가 상당한 사업이라 나는 더 긴장했다. 내 점수에 당락이 결정되는 건 아니더라도 신중하게 평가해야 하는 건 당연한거니까. 

 

어? 근데 읽어보니 재미있다?!

 

미얀마 민주화 노동부터 반려견이 미국으로 입양되는 과정을 개의 시선으로 보는 다큐, 청년문제와 전통문화의 접합지점 등 이 시대상들이 품고 있는 문제들이 한 눈에 보이기도 했고, 치매를 예방하기 위한 VR 제작 과정, 해녀들의 이야기,  월남 참전에서 성직자가 된 사람, 6 25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던 말(horse), 관동대지진의 진실, 에코 다이닝, 노동자로 살았던 독립운동가들, 직지심경 등등 참신한 내용들도 많아서 어찌나 흥미롭게 봤었는지.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는 도대체 어떻게 나오는 거야? 기획자, 작가들이 얼마나 사전조사를 많이 했을까? 궁금증을 폭발시켜 가며. 

 

잘 된 기획안, 모자란 기획안의 선택, 그리고 평가에서만 그치는게 아니라, 중소제작사로서의 발전과 추후 확장될 수 있는 영역까지 두루두루 살펴야했다. 처음 보는 기획안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메시지를 주고자 하는지 한 눈에 보였다. 말만 거창하게 늘어뜨려놓은 기획안부터 일정까지 꼼꼼하게 정리해놓은 기획안까지 신기하게 그 안에서 다 보였다. 기본 10년에서 20년 이상의 기획자, 작가들이 연출과 구성을 알차게 만들어놨는지... 단 두 장의 기획안 작성에도 며칠을 고생하던 나였는데, 이런 기획안을 이들은 어떻게 다 작성했을꼬.... 

 

나오는 길은 영혼까지 털려 털래털래... 생각보다 심사비가 많다고 여겼는데, 다 끝나고 보니 아니야. 그 정도는 당연히 받아도 돼... 스스로 위로하며 걸어 나왔다.

 

충분하다 자부할 순 없지만 제작, 구성의 경험을 어느 정도 쌓았고 지금은 나름 잘 된 글과 아닌 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으므로. 그래. 평가위원 활동도 해낼 수 있었네~ 하는 칭찬을 듬뿍 해줬던 날이었다.   

 

막차까지 3시간 정도 시간이 남아서 망원동 가서 오상진 김소영이 운영하는 독립서점 '책 발전소'도 가보고, 망원시장 들려 김치국수랑 튀김을 말끔히 비워내는 저력을 발휘. 내려오는 기차안에서는 신나게 1박 2일 보면서 룰루난나 진주에 도착했다.

 

집에 오니까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아이들과 남편이 뻗어 있는 모습을 보니, 일 마치고 밤늦게 집에 온 가장들이 이런 기분이겠구나... 느끼며ㅋㅋㅋㅋ

 

새로운 경험 한다고 고생했고, 수고 많았다. 백지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