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저는 전직 라디오 리포터였습니다

어진백작 2021. 3. 25. 06:21

 TV 아니고 라디오. 소리가 있는 곳이면, 이야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마이크 앞부분을 쓱- 갖다대고 숨죽이며 현장을 담던, 나는 전직 라디오 리포터였다. 똑같은 현장이어도 영상에 담는 것보다 숨은 내용까지 전달할 수 있어서 매력적이었던, 영상은 담을 수 없는 구석구석까지 찾아 누비던 시절. 적극적이고 친화적인 성격이 주 무기가 돼 딱히 섭외를 하지 않아도 웃으면서 다가가면 큰 외면없이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가능했던 그 날들. 

 

 갑자기 지난 날을 돌아보는데는 이유가 있다. 진주 KBS에서 전화가 왔다. 리포터가 급히 필요한데, 가능하겠냐-는 연락이었다. 여러 생각이 오갔지만, 오후 5시 방송이란 말에 깔끔하게 접어야했다. 6시에 마치면 아이들 하교, 하원에다 저녁시간이 촉박하기 때문. 1분 정도의 통화였지만 꽤 심경이 복잡한 최근이었다. '내가 다시 리포터를 한다면?!' 이라는 생각이 며칠간 내 머릿속에 머물다갔다. 

 

 리포터를 시작하고 3년은 헤맸었다. 딱 앉혀놓고 가르쳐주던 사수도 없었을뿐더러, 방송에 관해서는 '신방과' 학력이 전부였기에 녹록치않았다. 보통 리포터는 방송아카데미를 수료한 친구들이 많은데, 수료증 하나 없이 이 세계에 발을 턱- 하니 들여놨기에 모든 시작이 엉망이었다. 4명의 피디가 교체되는 동안 정말 수도 없이 혼나고, 욕먹고, 챙김도 받았던 시절, 방황도 많이 했었지만 견뎠다. 하루를 분단위로 쪼개서 일했다. 하루에 5곳이나 넘는 현장을 돌아다니기도 했고, 믹스커피 3잔으로 하루를 버틴적도 많았다. 

 

 3년 째를 넘기고 나선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새 자신감을 장착하고 있었고, 취재 현장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그 어떤 취재가 맡겨져도 곧잘 해냈다. 5년차부터는 정점을 찍었다. 부산에서 라디오 리포터 하면, 내 이름이 제일 먼저 언급될 정도로 날아다녔던 시절. 따르던 후배들도 늘어나고 성우직도 겸하고, MC에도 도전하며 즐겁게 일했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리포터 직을 사랑했다. 같은 일을 하는 친구를 만나면 그 수고스러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챘다. 이 세상 그 어떤 직업도 다를바 없겠지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고, 즐기지 않으면 해낼 수 없음도 너무 잘 안다. 

 

울산 TBN 내 첫 MC 시절, 파트너 성헌 씨와 찍은 프로그램 프로필 사진

 

 사실은 그래서 피디님의 제안을 거절했다. 도저히, 그 힘듦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컸다. 젊었기에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내 안에 에너지가 철철 넘쳤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다신 못해... 라는 말이 그냥 튀어나왔다. 열정이 사라졌다기 보다 사람에겐 그 상황을 해낼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한다고 해도 그 때만큼의 에너지가 지금 내겐 없다. 온전히 내 일에만 쏟았던 시간과 에너지를 분산시켜야 할 때다. 세 아이를 건사해야 하고, 지금 하고 있는 일들에 집중해야 한다.

 

18대 대통령 선거 개표현장 중계- 박근혜....그네....ㄱ.....

 덕분에 추억에 젖어봤네. 방송은 여기까지 하기로. 리포터는 추억인걸로ㅎ 작가로 전향한 지금의 나를 또 즐기자. 언젠간 내가 쓴 글로 찬찬히 얘기할 수 있는 날이 올거야. 지금의 나를 있게한 '백지혜 리포터'는 그 때 그 시간에 그대로 묻어두자. 안녕~

 

P.S. 통신원 일 시작한 정희 언니- 축하해요. '잘 할 수 있겠냐는 말'은 그 힘듦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한 우려의 말이었어ㅋ(혹시 이글을 보면 더 이해가 가지 않을까 하여 남깁니다) 언니가 가지고 있는 진주를 사랑하는 마음과 어떤 일이든 진심으로 다가가는 진정성이 큰 힘이 될 거예요.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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