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눈부셨던 날들

어진백작 2021. 3. 1. 06:48

물안경 쓴 것이 나다

 

제주 바다의 싱그러움을 이긴 우리들
섭지코지를 삼겨버린 화보
백형의 생일축하용이었지만, 여행을 마무리하는 의미가 컸던 케익

 

우리들은 각 방송사의 막내 리포터들이었다. 딱히 잘못한 게 없어도 주눅들어 있었던, 의식적으로 예민한 선배들의 눈치를 보고, 심지어 모든 면에서 잘해야 본전이었던 시절. 기댈데 하나 없는 막내들이 모여서 서로를 의지했던 네 명의 리포터는 10년 전, 여름 휴가 시즌을 앞두고 폭탄 선언을 한다. 

 

"이 날부터 이날까지 휴가 다녀오겠습니다." 

 

선배들이 먼저 정하고 남은 일자에 등떠밀듯이 휴가를 다녀와야 했던 막내들의 도발이었다. 얘네봐라?! 심지어 네 명이 전부 일정을 맞춘다고?! 그것도 한꺼번에 3박 4일을?! 선배들의 욕들을 온몸으로 쳐받으며(절대 과격한 표현이 아니다) 제주도 여행을 감행했던 그날의 패기들. 돌아보니 이것도 추억이다. 잘했다. 욕먹었던 건 잊혀졌어도, 최고의 시간을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기지 않았나. 

 

10년동안 여름만 되면 그날들이 소환됐다. 도착하자마자 제주도 교통방송을 찾아 들으며 실력을 비교하고, 비오는 날 우체국 앞에서 다른 운전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마지막 날 정산과정에서 잊을 수 없는 은행놀이, 함께 들었던 노래, 함께 봤던 절경들, 그리고 밤새 자신들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줬던 시간들이 어쩜 이리도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생각만으로 행복해지는 순간들을 갖고 있다는 건, 절대 행운이다. 

 

92층 아래로 보이는 해운대뷰는 한껏 우리를 상기시켰다

 

10년 만에 다시 모였다. 일산, 시흥, 진주, 부산으로 각각 흩어져 살던 우리들이 모였다. 왜 10년이나 걸렸는지에 대해선 모두가 공감할 부분. 자신만 걱정하면 됐던 20대와는 너무나 달라진 삶. 각자 남편과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한 명은 기차로 3시간을 이동해 오고, 또 한 명은 세 아이를 시엄니께 맡기고 2시간을 달려오고, 또 한 명은 아들래미 생일 잔치를 마치고 밤 11시가 넘어서야 합체. 브라보. 그 어려운걸 해냈다. 

 

시간이 아까워서 잠들 수가 없었다. 이미 몸에 익어버린 새벽기상을 피할 길도 없었고 설레서 다시 잠들 수도 없었던 나를 비롯해 모두가 같은 마음이었다. 돌아가며 변화된 자신의 인생을 얘기했다. 켜켜이 쌓아뒀던 그간의 사정들을 털어놨다. 그러다 눈물도 흘렸다. 얼마나 집중했었는지 새벽녘이 깊어지는 줄도 몰랐다.   

 

10년 전 우리들은 하나하나 참 개성이 뚜렷했던 존재들이었는데, 달라도 어떻게 이렇게 다를 수 있지? 도리도리 저절로 고개가 흔들리던 사이였는데... 이제와보니 이렇게 닮아있었다니. 누구보다 사람을 잘 믿고, 잘 믿는 만큼 다치고, 후회했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순수한 사람들.

 

"왜 사람들은 우릴 있는 그대로 봐 주지 않는 걸까."

 

그래서 더 반가웠는지도 모른다. 오해와 편견 속에서 힘들게 버텼던 날들의 보상이었다.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주는 사람들. 달라진 지금의 삶도 충분히 살아갈 만 하지만, 10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는 사람들. 어쩔 수 없이 세월 속에 변한 날 부끄럽게 만드는 사람들. 밍기. 진빠뤼. 혜룡. 백형. 이 이름들로만 기억하고 싶은 내 사람들. 

 

 

30대 끝에 다다른 우리들. 여전히 예쁜 너희들. 

새벽 시간도 모자라 다음 날 오후가 되도록 멈추지 않았던 이야기들 속엔 뭐 하나 빠뜨릴게 없었다. 그 무엇도 놓칠 수 없어 마시는 술에 취하기도 싫었다. 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큰 맘 먹지 않고서는 쉽지 않은 재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헤어지기 전까지 서로를 꼭 껴안았다.    

 

"또 보자. 내 청춘들아."

 

열심히 살다가 빛나던 그 때를 추억하고 싶을 때 또 용기를 내자. 그리고 그 땐 꼭 제주도로 가자. 가서 곳곳에 숨겨놓은 보물같던 그날의 우리들을 꼭 다시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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