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기적의 대청소

어진백작 2021. 2. 23. 06:07

 

이사를 계획 중이다. 44평임에도 방이 3개 밖에 되지 않는 이곳에서 더이상 살 수 없다 결론을 내렸다. 시운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언제까지 5명이 한 방에서 뒹굴고 잠들 수 없다고 판단했다. 평당 가격만 생각하면 금산내 아파트만한 곳이 없기도 하거니와, 금산에서의 생활이 크게 불편하지 않으므로 옆 단지로 옮기기로 마음을 먹었다. 51평에 복층까지 있으니, 활용할 공간이 많아졌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랄까. 갈 곳을 정해 놓은 것까진 좋은데, 우리 집이 문제다. 인기없는 비확장에 여기저기 애들의 낙서로 가득한, 꺼내놓은 물건들은 오갈데가 없고,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는 이 집을 과연 누가 사겠다! 하겠나. 시세보다 조금 낮추는 걸 감안하고 적정 가격을 중개사한테 제안했다. 어라?! 그런데 내놓은지 하루만에 연락이 왔다. 

 

"오늘 집 보겠다는 분이 계신데, 가능할까요?"

 

비상이다. 엉망진창이다. 그야말로 전쟁터다. 어떻게 이런데서 사람이 살어?! 라고 할 정도로 참혹한 수준이었다. 

 

"최대한 늦춰주세요. 어떻게든 치워볼께요!"

 

오마이뉴스 소식을 접하고 1시간도 채 되지 않아 받은 연락이라, 기쁨을 만끽할 정신이 없었다. 어쨌든 이 집에 팔려야 이사라는 걸 할 수 있으므로. 거의 사활을 걸다시피한 대청소가 시작됐다. 

 

얼마되지 않는 애들 책들은 질서를 잃은지 오래. 이렇게 꽂기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진짜. 촤암놔. 하나하나 끄집어내 질서만 정렬시키길 30분.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색종이, 스티커, 잡다한 폐지들, 하이패스 고지서까지 꽂혀있고 막. 책장위는 또 어땠게?! 포대자루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나오는 쓰레기들. 언제산지도 모르는 아이들 장난감. 갈곳을 잃은 액자와 사진들까지. 내가 이런 곳에서 숨을 쉬고 살았다니ㅋㅋㅋㅋㅋ 음식물 안나온게 다행이라며 위로하고 막.... 어휴. 

 

애들책장과 내 책장을 치우니 안방 차례다. 세 아이들은 유독 자기것을 지키는 것에 예민한 편인데, 언니 오빠 것이라면 무조건 만지고 부수고 보는 막내 때문에 막내가 손이 닿지 못하는 선반 위 족족 아이들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더 깊이 자리한 곳은 다리가 좀 더 긴 첫째의 물건들, 둘째는 아예 서랍장 안에 숨겨놓기 바쁘다 보니, 그걸 치우는데만 또 한 시간쯤 걸렸다. 아우. 허리야. 앉았다 일어섰다를 얼마나 했는지 기억도 안난다. 

 

거실과 안방을 정리하는동안 남편은 발코니 쪽을 맡았다. 이곳 사진은 미처 찍어놓질 못했는데, 직업군인다운 정리각을 제대로 보여줬다. 작은 화단엔 아이들 모래놀이 도구를 적절히 배치해 인테리어 효과도 좀 주고, 버릴 것들을 내놓고 나니까 널찍한 베란다가 떡하니 나타났다. 아... 우리집이 이랬구나. 맞어. 이랬었지. 처음 이사왔을 때, 그 때 말이야. 

 

손발이 척척. 호캉스의 효과였을까. 이것 좀 치워죠. 여기 여기도! 뭐 이런 한 마디 없이 알아서 움직였다. 4시간 정도를 둘이서 부지런히 움직이니까 저런 집이 탄생했다. 이 모습은 딱 두 번 본적이 있다. 갓 이사해 왔을 때 한 번, 그리고 셋째를 낳고 산후도우미 이모님이 오셔서 집안일을 거들어 주셨을 때다. 그 두번을 제외하곤 여기 살았던 5년 동안 이런 모습은 본적이 없어서, 너무 새롭고 신기해서 사진을 찍어뒀다. 아... before 사진이 있었어야 했는데.....

 

우리 집이 이렇게 괜찮았었구나. 손을 대면 이렇게 훌륭한 보금자리가 될 것을 왜 여태 엉망진창인채로 뒀을까. 여기서 또 현타가 온다. 나의 죄책감이 한 줌 더해진다. 맘 먹지 않아서 그랬었구나. 이 집에 들어와 두 아이를 낳고 다시 일을 시작했으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말하면 충분한 핑계거리가 될까.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집정리가 지난 날 내 성장을 위해 포기한 것이라고 말하면 조금은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가정주부와 워킹맘에게 보금자리를 쓸고 닦고 하는 부지런함은 내가 해야할 수많은 일 중에 어디쯤 둬야 맞는 걸까. 아니야. 나만 치울 필욘 없잖아? 정리되지 않는 삶을 사는게 죄는 아니잖아? 그래 이것도 편견이야. 어지르는 사람이 다섯 명이고 치우는 사람이 한명이란 게 처음부터 말이 안되는 소리였어. 맞아. 내 잘못이 아니야. 

 

폭풍같은 정리가 끝나고 중개사와 한 가족이 집을 방문했다. 말도 안되게 엉망진창이라고 수차례 얘기해뒀던터라 중개사가 미리 언질을 해뒀나보다. 들어오자마자 "어머?! 집이 와이래 좋노?!?" 자신의 예상을 빗나간 모습에 중개사까지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픽 하고 새어나왔다. 아무렴요. 4시간 대청소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거사를 치뤘으니, 맥주 한 잔 해야지?!"   

 

   

온몸이 안쑤신데가 없는데, 그래서 빨리 자고 싶었는데, '거사'는 정말 '거사'였으므로ㅋ 꽤 오랫동안 술잔을 기울이며 이 집을 추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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