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내 머리에 봄바람이 불었다

어진백작 2021. 3. 19. 07:13

 

그 어느 미용실에 가도, '머리 숱이 정말 많으시네요' 라는 말이 직원의 푸념으로 들릴 정도였다. '이 많은 머리를 언제 다 마나...'의 의미였을거다. 게다가 반곱슬인터라 매직과 컬을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에 한 번 가면 기본 15만원씩은 투자를 해야 봐줄만한 스타일이 나오는, 돈이 참 많이 들어가는 머리... 이번엔 과감하게 싹뚝. 숏컷을 감행했다. 

 

수십만원 돈을 들여도 내 머리스타일은 늘 뒷전이었다. 이번에도 '오랜만이네요' 라고 말하는 본부장 앞에서 꺼낸 첫마디가 "또, 엉망으로 만들어왔어요!". 늘, 방치하는 머리. 질끈 묶거나 올림머리가 전부였던 긴 머리가 그렇게 거추장스러울수가 없었고, 숱이 많다는 장점은 조금만 길어도 목을 뻐근하게 만드는 무게라는 단점으로 변해 늘 마무리는 좋지 않았다. 감은 머리를 말릴 땐 적어도 10분 이상이 걸린다 ㅠㅠㅠㅠㅠㅠㅠ

 

"아우, 속이 다 시원하다." 

 

목이 휑하게 드러나고 고개를 숙여도 하나 내려오지 않는 깔끔함. 꺄악! 너무 좋아~ ㅎㅎㅎㅎㅎㅎ

 

이런 숏컷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 번,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한 번 해본 적이 있다. 6학년 땐, 날 좋아하던 남학생이 하루아침에 남자머리로 변신해 온 것에 놀라서 마음을 접었을 정도의 충격이었다. 당시엔 꽤 상처로 다가와서, 왜 이렇게 잘라달라고 했냐며 엄마한테 울고 불고 난리를 쳤던 기억이 있다.(아우 귀여워ㅋㅋㅋㅋ 마음을 접은 그 놈이나, 거기에 상처 받은 나나 ㅋㅋㅋㅋㅋ) 이 때만 제외하면 나름 숏컷도 잘 적응하고 반응도 나쁘지 않게 잘 지내온 듯, 그런데 이번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철저하게 어려보이기' 

 

서른 아홉. 리프팅이나 보톡스 피부 시술 한 번 받은 적 없는 내 얼굴은 8자 주름으로 세월의 변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피부 시술은 더 많은 돈이 들어가겠고, 그럼 어떻게 해야 좀 더 어려보일 수 있을까? 거부할 수 있는 만큼, 부정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젊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생각해보니 처참하다. 이렇게까지 발버둥을 칠 일인가....

 

그런데, 생각보다 지인들의 반응이 좋다! 그럼 목적 달성?! 그냥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과감한 결정에 더 큰 응원을 보내는 것 같다. 뭐든 망설임 없이 결정해버리는 내 성격 (후회할 일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런 기억들은 빨리 잊어버리기 때문에 대부분 긍정적인 결과만 남는) 이 기질을 발휘한 하루였다. 

 

아이들 반응은 어떨까? 집에 들어서자 마자 막내울음 소리가 퍼져 나왔다. 분명 배가 고파서 짜증이 난 울음이었다. 타요 자동차가 주차장에서 자꾸 미끄러져 나와서 신경질이 났다고 할머니가 전해줬다. 엄마가 온 소리를 듣고 이 억울한 상황을 일러바치러 뛰어나오는 막내는 나를 보고 멈췄다. (정확히 내 머리를 보고 시선이 멈췄다.) 입은 울고 있는데, 눈은 놀라고, 발은 더이상 떼어지지 않고ㅋㅋㅋ 그 자리에 서서 한 5초간은 상황을 점검하던 막내 ㅋㅋㅋ 시운이는 예쁘다고 했고, 지운이는 왜 이렇게 못났게 해왔냐며 직격탄을 날린다. 너희들 반응따윈 중요하지 않아 ㅎㅎㅎ 엄마만 만족하면 돼ㅋㅋㅋㅋㅋ

 

남편의 반응은? 

 

바라보더니 한 15초 만에 '예쁘다'가 나왔다. (그건 예쁜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어서 한 질문, 

 

"당신은 마음에 들어? " ('나는 별로' 라는 말을 한 것 같다ㅋㅋㅋ)

"응!" 

 

무안했는 지, 

 

"더 밀지 그랬어~" (여기서 어떻게 더 밀 수가 있어? 장놘해?)

 

더 이상 캐물으면 곤란해 할 것 같아 말을 줄였다. '결혼은 노력하는 것'이라고 승훈 쌤이 그러던데- 더 큰 불화를 막기 위해 대화를 줄이는 것도 일종의 노력이니-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짓는 게 현명한 대처였다. 

 

 

머리를 하고 나오는데, 기분좋은 바람이 내 뒷 목에 닿더라. 그것만 기억해두자. 봄맞이 새단장 끄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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