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사랑의 역사

어진백작 2021. 2. 18. 07:25

바다를 좋아하는 정원현씨. 핑크빛 구름이 바다랑 제법 어울린다.

서울 출장 파크하얏트가 넘 좋았다고 그 기억을 틈틈이 꺼내놓는 내게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호캉스 한 번 해보지 뭐"

 

의외다. 평소 같으면 '캠핑'이나 '오지체험' 이런 말을 꺼낼 사람이 분명한데, 이상했다. 그냥 꺼내본 말이었는데, 내가 덥썩 물어버린걸까. (내심 또 놀랜 거 아냐?!) '이걸 물어버리네?' 하고 ㅋㅋ

 

결혼 기념일이 3월 15일인데, 3월에는 뭔가 분주한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아서 일정을 좀 당겼다. 친정엄마에게 SOS를 보내고, 시엄니께도 양해를 구했다.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얘기에 단 한 마디 군말도 없이 수긍해주셨다. 두 분도 너무 잘 아시기에.

 

평소 우리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다. 돌아가며 묻는 아이들의 질문과 요구를 받아주느라 그렇다. 단 10분만 지켜봐도 안다. 최근엔 셋째의 말이 급격하게 늘어서 과부하가 걸릴 지경이다. 이게 뭐야? 라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왜요?! 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한다. 세살 짜리의 질문이 이래도 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ㅎ 웃기고 신기하고. 암튼, 우리는 둘만의 시간이 절대 필요했다. 

 

다른 조건들은 필요없었다. 바다를 보면서 반신욕을 즐기고 싶었다. 선택권은 내게 주어졌으므로ㅋ 그 이유 하나만으로 선택한 곳이 기장 힐튼, 어제 여기를 왔다. 진주를 출발해 부산으로 이동하는 길 운전대는 내가 잡았다. 남편은 고속도로 운전을 힘들어한다. 저 세상 갈 뻔한 사고를 2번이나 당해서 그렇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차량을 보면 긴장을 하고, 꼭 한 마디를 하며 앞서가거나 피해간다. (사실 그 말을 듣는 게 너무 피곤하다. 그냥 좀 지나가도 될 것을... 신경 좀 안쓰면 될 것을...) 남편이 운전대를 잡으면 대화의 반 이상이 우리를 지나는 차량들 얘기여서 재미가 없다. 이왕 여행 기분 낼거면 다른 이야기를 해도 운전에 방해를 안받는 내가 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이번엔 기여코 내가 하겠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떼를 좀 썼다. 적중했다. 호텔까지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신나게 지난 추억들을 꺼냈다. 

 

"당신 그거 알아?! 9년 전 오늘이 당신이 고백한 날이야. 알지?! 2. 16사태?!" 

(2. 16 사태 사건의 전말은 수위조절이 힘들어 여기서 밝히기 어렵다)

 

이 날 이후로 아직도 내 폰에는 남편이 '핑크빛장미'로 저장돼 있다.

 

결혼 기념일 이벤트로 잡은 호캉스였는데, 페이스북에서 9년 전 사진을 소환해주는 바람에 알게 된 9년 전, '오늘부터 1일'의 시작이 오늘이었다니. (어제 시점에서) 촤르륵, 지난 시간들이 스쳐지나간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은 저 사람이 기억했다. 서로 다른 기억들이 충돌을 하면 목소리를 높혔다. 기분좋은 하이톤이었다. 우연히 맞아 떨어진 그 시간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호텔에 도착하고 저녁을 먹으면서도 난 참 신이 났다. 사랑이 샘솟았다기 보단, 9년 정도 맞췄으니 이렇게 자연스러울 수 있구나... 그래. 이렇게 서로에게 적응하는 구나.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랑에 빠져서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게 되다니. 그 과정을 더듬어 보니 가히 이건 '기적' 수준이구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마음이 상해 후회했던 날도 있었고, 저 사람은 나 같지 않구나 라는 생각으로 모른척 해보고도 싶은 날도 많았지만 어쨌든, 우리는 여기 함께 있구나... 그래도 같이 있구나... 정말 애들 걱정 1도 안하고 그는 바다를 즐기고, 나는 또 이 여유로움을 즐기고~ 동이 트기 전 글요일 글을 쓰면서 마무리 하고 있는 중.

 

바다 전경은 정말 여기가 최고다

 

바다를 보며 하는 반신욕은 꽤나 훌륭했고, 시끌벅적한 아이들 소리 없이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남편도 만족해했다. 손흥민이 골넣는 하이라이트 장면을 제대로 즐겼다며ㅎ 어쩌면 이 시간을 나보다 더 간절히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이후로 거의 모든 공연이 취소되면서 칼퇴근 했던 남편은 늘, 언제나, 아이들 독차지였기 때문에. 고생했어 당신. (진짜 나보다 더 육아로 고생 중인 당사자ㅋ)

 

내가 좋아하는 윤종신 노래 중엔 '사랑의 역사'라는 곡이 있다. 윤종신이 작사, 작곡을 하고 조성모가 부른 노래다. 한 연인의 시작과 끝을 얘기한 노래지만 곡이 주는 여운이나 분위기는 너무 아름답다. 한 번 들어보시길. 

 

www.youtube.com/watch?v=cbCgtrFkk0I

 

 

9년의 역사를 지나보내며, 그리고 다시 돌아갈 현실을 받아들이며- 아침해를 맞이한다. 사랑해~ 이런 결말은 없다ㅋ

 

"어여 일어나! 조식먹으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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