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난각번호

어진백작 2021. 1. 26. 06:41

가장 친한 친구가 얼마전 온라인 마켓 하나를 추천해왔다. 가성비가 너무 좋은 곳인데, 식재료들이 신선하기까지 하다며 얼른 회원가입하고 만원 쿠폰까지 가지라고. 이 좋은데를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말했다. 

 

"달걀 난각번호 좋은 걸 찾고 찾다가 발견한 곳이 여기야."

"난각번호가 뭐야?!"

"야야야! 너는 작가라는 게 이것도 모르냐?!"

"히잉.... 뭔데뭔데."

"닭이 A4 용지정도 되는 케이지 안에서 알을 낳는데, 그 공간에 몇마리가 들어가 있는지가 적힌 번호야."

"오호라~"

"그러니까 난각 번호가 4로 끝나면 A4지 용지 정도 되는 공간에 네마리가 들어가있는거라고!"

"!!!!!!!!!!!!!!!!!!!!!!!!!!!!!!!!!!!!!!!!!!!!!!!!!!!!!!!"

 

무지가 또 하늘을 찌른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이가 셋인데, 이런것도 모르고 키워왔다. 젠장. 

 

"근데, 1 정도면 많이 비싸지 않아? 우리집엔 달걀 소비량이 진짜 어마어마하거든."

"많이 먹는 것일수록 좋은 걸 먹어야지. 안좋은 건 오히려 독이야 독."

 

 

아.... 심리적 갈등이 밀려왔다. 좋은 걸 먹이는 건 좋은데, 이걸 우리집 벌이로 충당이 될까. 자연 방목으로, 친환경으로 닭을 키우시는 지인의 농장 가격도 알아보고, 최대한 유기농과 친환경 제품으로 알아봤지만, 10개에 5천원 대가 최선이었다. 친구가 알려준 사이트에선 난각번호 '1'이 적힌 달걀 10개가 3천원 대라고 해서 대박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갈등이 멈추지 않았다. 

 

 

한 달여 정도가 지났을까. 우리 집은 거의 매일을 달걀 서너개씩 삻아서 산을 오르시는 시엄니가 계시고, 한 번 계란 후라이를 만들면 기본이 세 개. 그런데, 그걸로도 모자라는 지 하나더! 하나 더!를 외치는 아기새들.... 그럼 나와 남편은 계락 먹기를 과감히 포기한다. 마트에서 사면 난각번호가 4라고 적힌게 대부분인데, 30개 한판을 사도 그게 일주일을 채 버티지 못하니 난감하다. 한 번 식사에 7개를 구워낸 적도 있다. 정말 뜨악할 일이다. 

 

남편이 어제 장을 봐왔다. 마트에서 사람들이 달걀을 사재기를 하고 있다고 했다. 30개가 원래는 5천원 대였는데, 오늘은 6천원을 넘었다고 했다. AI 가 전국을 휩쓸어서 닭이란 닭은 다 살처분하고 있다고... 좀 더 사오지 그랬어~ 안그래도 우리집은 달걀 소비량이 많은데. 안돼. 이대론 안돼. 한 사람당 1개씩만 먹어! 금지 금지 할머니도 금지! 다 금지!!!!

 

연말 정산을 하는데, 남편 연봉에 가까운 카드값을 어찌할 것이냐며- 자기가 살펴보니까 죄다 마트에서 장을 본 것이라고. 큰일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엥겔지수를 낮춰야 한다. 그러려면 음식 섭취량을 줄여야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줄여야 할 지 모르겠다. 뿌엥. 긴축재정! 통장관리와 가계부를 남편이 써보겠다고 해서 넘겼다. 그래서 달걀의 난각번호 따위 주장할 수 없다.  

 

친구야... 나는 여기서 그만 애쓸께. 너는 하나지만, 우리집은 셋이란다.

난각번호 따지다가 집안살림 거덜나겠어 아주. 여기까지만 할께.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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