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정인아미안해

어진백작 2021. 1. 10. 02:22

 

보고 싶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 애썼다. 눈과 귀를 다 막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충격의 강도가 예상됐고, 분노 조절이 힘들 것 같았지만 봐야했다. 내 작은 관심이 다른 작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딱 우리 집 막내 채운이만한 개월 수. 볼살도 통통하게 오르고 웃으면 눈이 반달 모양이 돼서 울고 있던 사람도 웃게 만들만한 기가 막힌 미소. 정인이의 웃는 사진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저렇게 밝고 건강한 아이가... 왜 이리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됐는지, 그 이유들을 차근차근 집어가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정인이편'이었다. 

 

첫째 아이가 있는 가정집에 둘째로 '입양'된 정인이는 떠들썩하게 입양파티를 했다. 두 목사의 아들 딸이기도 한 양부와 양모는 결혼 전부터 '입양'의 의사를 밝혀왔다고 한다. 그 누구도 쉽게 하지 못하는 선택이므로, 주변의 응원과 존경의 눈빛, 혹은 대단함을 사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입양 파티를 포함한 정인이 가족의 이야기가 EBS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정인이를 입양한 양부, 양모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자기 자식 첫째 딸의 친구만들어주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만큼이 전부였던 것. 마음으로 낳는다던 입양의 의미가 무색해지고 심지어 퇴색된 이들의 만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입양될 때부터 온몸에 몽고반점이 유독 컸고, 아토피도 심했다던 양부의 거짓말 속엔 시도 때도 없이 이뤄진 학대가 있었다. 양모는 피트니스 운동을 2시간 넘게 다녀올 때도, 지인 집에 4시간이 넘게 수다를 떨고 올 때도 정인이를 불꺼진 방에 가둬두고 다녔다. 돌이 훨씬 지났음에도 이유식은 소량의 죽 형태였고, 마사지를 해줘서 생겼다던 허벅지 안쪽의 시퍼런 멍자국들은.... 그리고 옆통수와 볼 위로 손자국처럼 혹은 발자국처럼 길게 나있는 멍자국들은.... 아.... 지금 입을 벌리면 쌍욕이 나올 것 같다. 

 

좀 정신을 차리고 보기로 했다. 그것이 알고 싶다 팀에선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까?! 에 초점을 맞췄다. 소아과 전문의 정신의학과 전문의, 응급의학과 전문의, 국과수부검팀 관계자 등등 수많은 전문가들의 인터뷰는 기본. 양모의 지인, 정인이가 다니던 어린이집 선생님들, 정인이 집 아래윗옆집 이웃들까지 샅샅히 취재하고 인터뷰했다. 취재작가가 한 명에 보조 작가가 한 명, 그리고 김상중 만큼 그것이 알고 싶다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정모 대작가까지 참여했다고 한다. 이 작가가 맡았다는 건, 사활을 건 취재,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라 들었다. (함께 일하는 신피디가 이 팀에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정인이가 죽음에 이르게 된 가장 큰 원인이, 췌장 안쪽에 장간막 파열로 인한 출혈이었다는 것이다. 이 피들이 정인이의 배를 채우고 있었고, 피들이 장 속에 있던 공기와 마찰을 일으켜 어마어마한 통증을 유발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통증을 아무렇지 않게 견디고 있었던 정인이.... ㅠㅠㅠㅠ

 

장간막은 정말 척추 바로 앞에 위치할 만큼 배를 기준으로 하면 젤 안쪽에 위치해있는데 이게 어떻게 찢어졌을까?!에 대한 의문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나는 오열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권투 선수가 글러브를 끼고 아무리 힘껏쳐도 그게 끊어질 수 없다는 것이 전문의의 소견이었다. 그럼 양모가 어떤 짓까지 했길래 정인이의 장간막이 파열됐던 걸까.... 실험자가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어떻게든 그만큼의 충격을 주기 위한 행동들을 했는데....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와.... 흑.... 장면이 떠오르고 상상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끼쳐서 더 이상 글이 안써지네... 

 

여러가지 가설 중에 하나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으로 충격의 강도를 높히고 그 충격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실험을 통해 알려주는 <그것이 알고 싶다>팀... 저걸 생각해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을까를 생각하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관련 기관들의 문제점도 짚고 넘어간다. 3차 아동학대 신고가 들어갔음에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경찰. 3번의 아동학대 신고의 사실을 알면서도 분리조치를 하지 못한 아동보호기관. 양모의 정신 심리적 불안을 제대로 심사하지 못한 입양 기관 등등등 팩트 폭격을 제대로 보여준다. 

 

마지막 10분은 김상중의 내레이션으로만 마무리 짓는데... 그냥 엉엉 울고말았다. 

 

잘 만든 프로그램 하나가 국민적 공분을 만들어냈다. 국민청원으로도 이어졌다. 많은 어른들이 정인이에게 사과를 하고 나섰고, 늦었지만 나도 이렇게나마 참여한다. 다시 태어났을 땐, 좀 더 나은 어른이 만든 좀 더 나은 세상이길 진심으로 바라며. 정인아 꼭 다시 태어나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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