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새벽 네시

어진백작 2021. 1. 23. 08:29

작년 9월부터 회사 제작비 중 일부를 관리하고 있다. 영수증까지 챙겨둘 필요는 없지만, 지급 내역이나 명목 등을 기록해두는 일이다. 백단위가 넘어가는 제작비를 갖고 있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얼마 전 팀장은 인턴 한 명이 쓸 컴퓨터 조립을 위해 부품들을 사 달라며 링크를 보내왔다. 습관적으로 배송지를 우리 집으로 하는 바람에 귀찮은 일이 발생했다. 부피도, 갯수도 많은 부품들을 다시 회사로 옮기는 과정에서 다소 짜증스런 일이 일어났던 것. 

 

진주에서 오후 3시 촬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팀장은 출근을 요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일(어제 기준) 촬영도 있으신데, 나머지는 촬영 후에 신피디 편으로 보내세요~ 하루 정도 늦어진다고 큰 일 나겠습니까' 라고 말해주면 좋았을 것을... 이래저래 상황을 설명한 긴 내 카톡 글을 읽씹하고 묵묵부답. 다시 진주로 가야함에도 오전 창원으로 출근을 요하는 행동을 암시했다. '아... 부정의 뜻을 모른척으로 전달하는 사람이구나....' 

 

오전부터 운전해서 출근 후 그 많은 부품들을 낑낑대며 혼자 옮기고 다시 진주 촬영지로 이동후, 촬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8시다. 이미 남편은 저녁을 다 먹고 고장난 수도 꼭지를 붙들어 매고 끙끙대고 있었고, 아이들은 돌아가며 내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지친다. 즐거웠던 회사생활을 마무리 할 생각을 하니 더 노곤해졌다. 마지막 작품만 잘 끝내고 내게 휴식을 선사하리. 그렇게 아이들을 재우다 잠이 들어버렸다. 

 

남편과 나는 요즘 각자의 시간을 요긴하게 즐기고 있다. 그런데 시간대가 겹치는 일이 잘 없다. 이게 신혼 때와는 다른 풍경이다. 마주앉아 이야기 하고 의견을 교환하기 보다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렇게 평행선을 그어가는 건가. 그러다 아이들이 다 커서 이 집을 떠나 버리면 우리는 더 각자의 시간으로 고립되겠지. 그렇게 노년을 보낼 생각을 하니까 쓸쓸한데, 또 그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차피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쓸 것이고, 남편은 낚시를 하고 캠핑을 다닐 거니까. 

 

남편이 자신만의 시간을 열심히 즐기고 안방에 들어온 시간이 새벽 3시 40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일찍이 잠이 들었던 나는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그리고 다시 잠들지 않았다. 월요일까지 마감할 원고가 있고, 어제 촬영지에서 메모해 두웠던 사항들을 촬영구성안에 수정해 넣어야했다. 할 일이 있는데 일찍 잠든 것이 분해서 그대로 몸을 일으켰고, 눈을 채 뜨지 않은 상태에서 노트북을 켰다. 

 

처음으로 집필계약서를 작성한 '별글' 첫번째 글 주제는 '추억의 음식'. 어제 소재가 될 만한 아이템을 정해놨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써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1시간을 꼬박 집중해서 썼더니 금방 완성됐다. 오늘 밤 다시 적당한 시간에 한 번 더 수정을 한 뒤 구글 공유 문서에 올릴 예정이다. 

 

글을 다 쓰고 나니 심적 여유가 생겼다. 유튜브로 이것저것 영상들을 보는데, 김태훈이 진행하는 '책 리뷰' 영상이 하나 뜨는 것이다. 김유진 작가의 '나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에 시작된다' 라는 책이었다. 유튜브 신기방기. 내가 4시에 일어난 건 어찌알고, 그 접속시간이 알고리즘이 되어 무려 3개월 전에 올라온 이 영상을 날리다니. 아, 그거 혹시 아는가?! 휴대폰이 전원이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일상생활에서 나누는 대화까지 녹음된다는 사실을?! 그 녹음된 내용 중 단어 하나에 해당하는 관련 광고를 내 폰 띄워준다는 사실을?! 아이폰은 덜 노출이 된다던데... 아무튼 뜨악할 세상 일들은 넘치고도 넘치다는 걸 새벽 네시에 깨달았다는 거.

 

김유진 작가의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더라. "새벽이라서 피곤한 게 아니라, 당신이 피곤한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피곤하지 않으면 새벽에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 그리고 일상생활이 아닌 새벽시간에야 말로 내 시간을 주도할 수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방금 내가 그걸 경험했지 않은가. 새벽 4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글 한 편을 쓸 수 있었고, 촬영 스케줄 및 구성안을 한 번 더 다듬을 수 있었고, 다이어리 정리로 놓쳤던 사항들을 체크할 수 있었고, 책 한권을 소개 받지 않았나. 지금이 8시 24분이니까 4시간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할 수 있음을 유레카!!! 하고 깨달은 것이다. 

 

잠은 충분히 잤다. 10시에 잠들어서 4시까지 잤으면 6시간은 잤지 않았나. 음. 좋다. 요즘엔 TV로 안봐도 드라마 정도는 폰이나 노트북으로도 볼 수 있다. 굳이 아이들의 방해를 받으면서까지 집중되지 않는 드라마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 와우. 좋은데?! 완전?! 새벽 네시... 매일 일어날수만 있다면 하루에 3시간씩은 내 시간이 생기는 것 아닌가. 의외로 정신이 맑고 세상이 조용해서 최고의 고요를 맛볼 수 있단 것 만으로도 좋다. 캬. 이 좋은 걸 몰랐네. 한 번 도전해보자. 4시 기상. 자~ 같이 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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