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사유

이사는 했는데 ep.3

어진백작 2021. 5. 25. 05:09

남편이 예약한 보일러 업체(진해 소재)가 약속을 4번이나 어기는 바람에, 이사를 했지만 온수를 쓰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는 어푸어푸 하며 찬물 샤워를 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은 그러지 못하므로, 인덕션에서 물을 대량으로 끓여 목욕물을 만들고 있었다. 인덕션 모델은 가성비 면에서 훌륭하다고 하는 '아에게 3구' 짜리. 3구 전체다 써버리면 차단기가 내려간다는 어마어마한 단점을 인지하고 있던터라, 우리는 2개만 사용해 물을 끓였다. 아이 셋을 다 씻기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커피 포트를 하나 더 꺼내 싱크대에 설치해 놓은 매립형 콘센트에 코드를 꽂고 물을 끓이는데 글쎄. 셧다운. 

 

"인덕션 세 구를 모두 쓰지 않았는데, 왜 차단기가 내려간거지?"

 

남편은 이날부터 우리집 전기 공사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흔히 두꺼비집이라고 불리는 우리집 배전함에는 전등1, 전열1, 전열2, 전열3, 쿡탑, 식기세척기, 에어컨, 등등 모두 8개의 스위치가 달려있었다. 절대 여기는 손을 댈 일이 없을 거라고 믿고 살았고, 중학교 '기술산업' 시간에 배운 A(암페어)니 뭐니라고 하는 전기량 단위도 살면서는 평생 알 필요가 없을 거라 여겼는데... 39년 인생에서 배전함을 뜯어내고 전기공사 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다니...

 

남편이 어떤 스위치에 어떤 코드들이 물려 있는지 전체 코드를 내렸다 올렸다, 한참을 가전 제품들을 하나하나 켰다 껏다 하면서 조사한 전말은 이랬다. 

 

 

전열1과 전열2엔 모든 전기량을 감당하기에 적당한 가전제품, 코드가 물려있었지만, 문제는 전열3이었다. 후드와 인덕션, 세탁기, 건조기, 그리고 우리가 서재로 쓰는 방 코드까지 다 물려있다고 했다. 스위치 하나당 20A가 최대치인데, 인덕션 제일 큰 구를 풀로 돌렸을 경우 24A (나머지는 각각 12A, 17A)  그런데 세탁기가 10A, 건조기가 6.5A, 커피포트가 9A, PC 1대가 3.6A..... 으으윽!! 계산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된다. 한 눈에 봐도 보이지 않는가. 이렇게 많은 전력을 한꺼번에 썼다간 불이 날꺼라고 했다. 그 전에 알아서 두꺼비 집이 내려갈꺼지만.

 

그럼 뭐가 문제야?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내가 세탁기, 건조기 두 대를 돌리고 있고, 서재에서 남편이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인덕션을 사용했을 경우, 전열 3이 모두 다운되는 참사가 일어나는 것. 그걸 방지하고자 인덕션 설치 업체에서 인덕션만 단독으로 셧다운되는 장치를 설치 했으나, 그래도 불안한 남편은 이 상태로 그대로 두면 안심이 안된다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전기공사를 시작한거다.

 

두꺼비 집은 최대치의 전기량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알아서 내려가는 기특한 녀석이지만, 전선들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라고 했다. '어? 자꾸 전기를 달라하네? 그럼 줘야지.' 라면서 자기가 소화해 낼 수 있는 전력량보다 더 많이, 계속, 전기를 옮겨다 준다고. 그럼 과열이 일어날 것이고, 그것들이 잘못 문제가 되면 화재가 발생한다고. 아... 이렇게 불이 나는 구나... 어휴. 난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살고 있었다. 이 무지한 사람아. 

 

그래서. 

 

남편은 지어진지 10년이 훌쩍 넘은 이 집의 일부(전열3) 전선을 바꾸기로 하고, 가장 걱정이 되는 전열3의 최대치 공급량 20A를 30A로 늘리는 작업을 했다. 집에 심어진 전선을 어떻게 바꾼다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지만 그 과정을 확인하고 보니... 우와. 나로선 정말 진귀한 작업 현장이었다. 

 

저기 아주 밝은 색의 줄이 보이는가. 저기에 기존 선을 다 뽑아내고, 좀 더 두꺼운 새로운 전선 세가닥을 묶어서 집어 넣기 시작한다. 넣는대로 쭉쭉 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한쪽에서 저 선을 끌어 당겨내야 한다. 

 

저 선 이름을 까먹었다;;;;; 아무튼 저걸 나는 집어넣고 남편은 쭉쭉 잡아 당겨서 전선 교체. 관로가 넉넉치 않아서 넣고 빼는데 진짜 애를 썼다. 기존 선들보다 두꺼운 선으로 교체하느라 그랬다. 

 

저 긴 선들이 다 들어가는게 너무 신기했다....ㅎ

 

오늘로써 지운이의 자가격리가 모두 끝나면서 12시 땡하자마자 지운이는 유치원으로, 시운이는 마하도서관으로 다 보내버리고 작업을 진행했다. 왜 아이들이 없어야 가능한 작업이었는지 그제야 알았다.

 

정리. 단독으로 20A를 쓰는 식기세척기 코드를 30A으로 늘리고, 그 곳의 코드를 따와서 인덕션 코드를 연결하는 작업까지 마쳤다. 그러니까, 전열 3에 묶여있는 인덕션을 식기세척기와 묶어버린 것. 그럼 식기세척기가 11A 니까 인덕션은 19A 이상 쓰면 셧다운. 같이 쓰면 안되고, 쓰더라도 3구 중 제일 큰 구 말고 나머지 구들을 이용해 하나씩 사용할 것. 뜨거워지는 전선들을 보호하고자 저런 장치들도 설치. (기존 인덕션 설치업자가 해놓은 Before 사진이 없는데, 딱봐도 엉망진창이었다.)

 

 

가스렌지를 쓰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들이 내가 인덕션을 쓰겠다, 다짐한 순간부터 일어난 일들이다. 미안했다. 하지만

 

1. 생각없이 무턱대고 가전제품을 사용해선 안된다는 걸 알게 됐고,

2. 우리 집에 전기 공사가 기존에 아파트가 지어질 때부터 엉망진창이었다(전열 3에 묶어놓은 코드들이 어마어마)는 사실을 알게 됐고,

3. 싱크대 설치업자와 인덕션 설치업자, 인테리어 업자가 얼마나 성의가 없었는지 알게 됐다. 

 

혹시, 인테리어 업자에게 싱크대와 전기, 조명까지 올 인테리어를 맡겼으면 이것까지 봐줬을까? 살짝 상상해봤지만,

아니. 남은 내가 살 집에 관심이 1도 없구나... 를 알게 되던 순간. 

 

오늘의 영웅

 

남편은 이 공사를 업자에게 맡기면 30만원에서 40만원짜리 견적이 나왔을 거라 얘기했다. 근데 왜? 당신이 했어? 라고 물으니까, 결국 그 사람들도 자재비를 아끼려고 싸구려 전선 및 설치 제품들을 쓸거라고. 헐. (나는 아직도 세상을 모른다)

 

근데 공사 내내 궁금했던 질문.

당신은 이런걸 어디서 배웠어????

 

무대 감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경기도 화성(지금의 동탄 신도시)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전기 공사(자기는 보조 역할)를 했었다며. 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이고, 예술회관 현장에서 인부들을 불러 작업하는 것들도 유심히 보고 관심을 가지니까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라고 했다. 

 

이 남자와 살면서 돈 주고 사람쓰면 될 일들을 왜 굳이 스스로 하는지가 늘 궁금했는데... 할 수 있으면 하면 좋지. 내 집이잖아... 신기해하고 기특해하고 고마워하며 살고 있다. 

 

전기. 아껴써야 하고, 잘 써야 한다.

어휴. 또 큰 공사 하나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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