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세계

내 글이 누군가에 의해 읽혀진다는 것

어진백작 2021. 2. 11. 06:12

 

 

 

방송작가로 일하는 동안 내가 썼던 글들은 누군가의 기사를 재가공하거나 또 누군가가 쓴 글을 방송이란 틀에 맞춰 다듬는 과정이 전부였다. 순수 내가 쓴 글이라곤 그 코너를 소개하기 위한 오프닝 정도에 불과했던 것. 길어봤자 13포인트로 5줄 정도? 그런데 그 내용 역시 해당 코너의 문을 여는 성격이라 완벽한 창작과는 거리가 있다. 

 

한 공단의 사보집 제작에 참여했던 것이 작년 12월. KBS 일과 병행하느라 틈틈이 자료를 찾고 실제 원고를 완성하기까지 한 달 정도가 걸린 듯 하다. 마감 날짜를 지키기 위해 며칠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그 결과물을 어제 받았다. 발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사보집을 받으러 가는 내내 연애시절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만 같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이 어찌나 신기했는지. 

 

한글 프로그램 새 글 창. 흰 바탕에 동동 떠 다니는 글들에 예쁜 디자인이 입혀지니까 완전 딴 글 같다. (이게 내가 쓴 글이라고?!?!?) SNS에 내 일상을 공유하기 위해 손에서 미끄러지듯 글을 썼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편집자라는 누군가의 손을 거쳐 다듬어지고 거기에 걸맞는 옷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짜잔! 하고 나타난 내 새끼들... (생명체를 가진 아이들만큼 소중하다) 이 감격을 어찌 설명할까. 게다가 전국의 공단 사원들에게 읽혀질 글이라 생각하니까 더 짜릿하다. 

 

공을 들인만큼의 수고료에 대해서는 아직 잘 판단이 서질 않은다. 그저 시도 자체에 의미를 뒀을 뿐.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에 책정된 원고료가 20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5년 전도 아니고 10년 전도 아니고 20년이란 세월이 지나도록 이쪽 바닥은 여전히 척박하다고 어느 작가님이 얘기했다. 그것뿐인가. 내 이름 하나 실리지 않는 일이라는 것도 안타깝다. 여느 건설현장에서나 들을법한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두는 방식이 이곳에서도 적용된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야 처음이니까 욕심내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간 수많은 작가, 에디터들이 글 값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환경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2주 정도 뒤면 에세이스트로서 정식 데뷔를 한다. 구독자가 채 스무명에 지나지 않지만 그 스무명을 위해 매일 정성스럽게 글을 쓰고 다듬는다. 읽으면 그만, 안읽으면 그만일 SNS에 올리는 글과는 달리 사뭇 진지해진다. 그 진지함이 걸림돌 돼 키보드에 얹은 내 손을 무겁게 만들지만 이 또한 내가 이겨내야 할 지점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술술 글이 잘 써질까를 고민하는 새벽. 아직, 작가로서는 너무 작은 내게 있어 너무너무 소중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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