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전쟁

조용한 자장가

어진백작 2021. 1. 12. 01:29

평소보다 몇배는 더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누르는 스트레스를 안고 퇴근하는 길. 한숨은 푹푹 쉬어지고 머리속은 복잡하고,  다시 수정은 해야할 것 같은데 어디가 문제인지 모르겠고... 팀장과 피디는 또 눈치싸움 중이고, 그 사이에서 나는 또 주인 잃은 강아지마냥 허공에다 답답함을 소리치는 초보 작가....따시. 

 

요며칠 남편의 수고를 알기에, 시간이 빠듯했지만 오늘은 내가 아이들 하원을 하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배가 고픈 둘째는 슈퍼에서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하고, 배가 무지 고프지만 밥이 먹고 싶은 첫째는 얼른 집으로 가자며 날카롭게 반응할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둘다 기분이 좋고 보채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은 채 즐겁게 차량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운전 중인 나에게 이노래 틀어달라 저노래 틀어달라 빨리 틀어줘 또 틀어줘 요구하는 게 많은 아이들이었는데, 묻지 않아도 유치원 이야기를 조곤조곤 얘기하던 시운이와 집에 도착하기 전에 잠이 들어서 집에 도착했다고 깨우면 세상 억울한 듯 울어재끼는 지운이였는데... 이상하다. 오늘은 내 기분을 미리 알아챘는지 온순했다. 어색했다. 며칠만에 자란건가...?!

 

이것저것 반찬 꺼내기도 싫어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장계란밥을 슥슥 비며 얼마 남지 않은 신김치를 반찬 삼아 뚝딱 먹이고 어지러진 집안을 분주하게 정리하기 시작했다. 움직이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구성안 수정해야 하는데... 내일 인터뷰 촬영인데 질문지 보내줘야 하는데... 생각뿐이었다. 궁금해하지도 않는 남편에게 괜히 내 기분을 최대한 상세히 설명하고 얼른 일을 해야한다는 신호를 보냈더니...

 

"그래! 오늘은 10시에 한 번 재워보자! 지금 9시니까 1시간 만에 해치워버리자!"

"좋아. 나는 주방을 정리할께. 당신은 애들 잘 준비를 시켜줘."

 

해서 정확히 9시 38분에 불을 끄고 5명이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허허. 그런데 그게 어디 내맘대로 되나. '앗싸, 성공!' 이라고 속으로 외침과 동시에 세 아이와의 난장판은 시작되었다. 침대 위에서 셋이 엎어지고 누르고 간지르고 소리지르고 레슬링을 시작하더니, 하나씩 목이 말라 물 마시고 왔다가 또 우유 마시러 나갔다 오기를 차례로 반복. 점점 시간은 흐르고 내 마음도 바빠지고 있는데, 아이들 목소리 게이지는 줄어들지를 않고. 여기저기서 으악! 내 배 누르지마아! 채운아! 내 베개 돌려줘어어어~ 엄마 지운이가 내 다리를 찼어요. 아빠! 안아줘. 누나 비켜어~~~~

 

고성과 괴성들 사이로 남편은 자장가를 틀기 위해 '헤이 클로바'를 부르기 시작! 그런데 그게 제대로 들릴리가 있나. 아이들 소리가 이미 소음, 그 이상인데?!?! 침대 젤 끝쪽에서 자포자기한 상태로 누워있는 나는 한숨을 또 푹푹... "10시에 재우겠다며... 10시에..." 이 소리마저 들릴리 없고.... 그렇게 난장판 속에서 남편은 더더 애타게 클로바를 외쳐댔다. 

 

"헤이 클로바!!!! 조용한 자장가 틀어줘!!!" 

 

스타트업에 나오는 똑똑한 영실이가 아닌 우리집 클로바는 능력이 적당히, 거기까지였을 뿐인데, 남편이 너무나 애타게 조용한 자장가를 부르는 그 마음이 뭔지 알 것 같아서 나는 웃음이 빵! 하고 터져버렸다. 

 

얼마나 조용한 순간을 간절히 바랬으면 '조용한' 자장가라고 소리를 쳤겠나. 얼마나 시끄러웠으면... 자장가는 말 그대로 잠이 들게 할 정도의 잔잔한 음악일텐데 거기다 대고 '조용한' 이란 수식어를 그렇게 힘차게 외쳐댔을까 싶어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전부터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조용한' 자장가 라고 말하면 우리집 클로바는 못 알아듣는다고.....ㅋㅋㅋㅋㅋㅋ 그냥 자장가라고 말하면 된다고.... 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집은 하나일 때와 둘 일 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소음이 일상화 되어 있다. 내 새끼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다 꾀꼬리 같이 듣기 좋은 말이나 목소리일까?! 아니다. 귀에서 피가 날 정도의 소음, 중의 으뜸 소음이 자주 나온다. 그 소음은 죽었다 깨어나도 적응이 안된다..... 그 소리를 잠재우기 위한 남편의 진심이 저렇게 나온 거라고 생각하니까 딱하기도 하면서 웃겨가지고 떼굴떼굴 굴렀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와 구성안을 수정하고 메일을 보내고 이렇게 글을 쓴다. 

 

오랜만에 폭소였다. 너무 소중한 웃음이었는데.... 잠은 쏟아지는데 걱정이 돼서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언제쯤 야물딱진 구성안을 쓸 수 있으려나......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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