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도전병

어진백작 2021. 8. 11. 04:36

까다롭기 그지없는 프리랜서의 조건들

 

새벽 3시 30분에 눈을 뜨고야 말았다. 근 1년 간 숨 한 번 차오르적 없다가 '살려고'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봤자 파워워킹, 하루에 '6천보 걷기'지만 말이다. 이틀째가 되니 근육들이 놀랐다. 정강이며 허벅지며 놀란 근육들이 울어대기 시작한다. 그만하라고, 이러다 죽을 것 같다고 항변한다. 후후. 그러나 나는 안다. 요것도 3, 4일이면 곧 잠잠해질 것을....

 

몸이 아프니 일찍 잠이 들었다. 유난히 피곤했던 하루였다. 음식량을 줄였더니 금새 배가 고파졌다. 고픈 배를 움켜잡고  빨리 잠이들었다. 7시 이후 먹지 않아야, 그것이 다이어트이므로. 밤 공기가 차가워져서 비염 증상인 콧물이 흘렀다. 일어나서 정비하니 3시 30분... 아... 오늘 일정도 빡센데... 오후를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어 걱정이 앞선다. 

 

피곤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어느 채용공고에 지원을 하기 때문이다. 자소서를 곧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제대로 빗나갔다. 자소서엔 일각연이 있는 한 선배가 첫 자소서를 보고 내린 점수는 10점 만점에 3.5점이었다. ㅎㅎㅎㅎㅎㅎ 그나마 손을 이리보고 저리 봐서 마지막엔 7점정도 된다며 칭찬을 아꼈다. 몇 번을 수정했는지, 디벨롭 과정이 굉.장.히. 피곤했다. 

 

 

이쯤이면 '병'이 아닐까 생각한다. 프리랜서로 사는 동안 참 많이도 채용공고에 원서를 냈다. 때론 붙고, 때론 떨어지면서 지금까지 왔는데, 곧 40이란 나이를 앞두고도 아직 자소서를 쓰고 있으니, 이게 맞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안정되지 않는 삶이 얼마나 고되고 사람을 '불안정'하게 만드는지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또 응시원서를 다운받고, 자소서를 쓰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번 응시에 가장 큰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남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대낮에 연락이 와서는

 

"OO 계장이 죽었대. 실족사래. 급성심장마비로."  

 

OO 계장은 3년 전 남편 팀에 팀장으로 왔던 사람이다. 나와 일면식은 없었지만, 남편을 통해 꽤 잘 알았던 분. 지금 남편이 있는 조직의 불공정한 처우들을 개선시키는데 누구보다 앞장섰던 분이라 남편이 잘 따르고, 함께 즐겁게 일을 했던 분이다. 다른 곳에 발령이 난지 고작 1년 정도가 지났는데, 오랜만에 들려오는 소식이 부고라니... 남편이 많이 심란해했다. 

 

장례식에 다녀온 직후, 남은 반찬을 안주삼아 남편이 술을 마시면서 얘기했다. 

 

"장례식장에서 본 미망인이 잊혀지지가 않아. 뭘 해야할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었어."

 

그러면서 훅 들어오는 질문,

 

"당신은 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지 고민해봤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질문이었다. 남편이 없는 삶을 떠올려 보지 않았다. 충분히 그 불행이 나에게도 닥쳐 올 수있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내가 갑자기 죽어도 당신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일을 했으면 좋겠어." 

 

아무런 계기 없이 이 말을 했었다면, 부부싸움이 일어났을 거다. 띵가띵가 내가 하고 싶은 일들만 하고 있는 꼬라지가 싫어서, 나만 먹고 놀고 하는 게 배아파서, 혹은 외벌이가 진절머리가 나서 하는 말인가? 딱 오해를 사기 좋은 말이니까. 하지만 그게 아님을 알고, 이 남자의 진심이 느껴져서, 며칠을 그 죽은 계장 때문에 슬퍼하던 눈빛이 거짓일리 없으니까... 창원에서 오는 내내 저 생각으로 얼마나 머리가 아팠을까... 하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안그래도 오늘 낮에 OO 선배가 연락이 왔었어. 괜찮은 자리있는데 생각있으면 지원해보라고."

 

원래는 남편한테 말하지 않고 몰래 지원해 볼 심산이었다. 합격하고 "쫘란!" 놀래켜주고 싶었다. 떨어지면 부끄러움은 나만 삼키면 되는 일이니까. 그런데 저리 나오니 어째. 얘기했지 모. 그랬더니,

 

"오! 좋다!! 그 일 괜찮은데? 한 번 열심히 해봐~"

 

이게 7월 말의 일이다. 열흘 정도 정말 열심히 원서를 작성했다. 

 

와... 근데 프리랜서, 비정규직이었던 내게 가해지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날 얼마나 괴롭혔게. 각 방송사 관계자한테 연락해서 이거해달라 저거해달라 말하는 게 자소서 10개 쓰는 것보다 더 어려웠다. 경력을 인정받기 위해선 발급기관 직인과 함께 발급자 성명, 연락처가 다 기재돼 있어야 한다는 것. 여태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무슨 발급기관 사업자등록증 사본까지 내라니까 머리에 쥐가 다 내리겠더라. 한낱 프리랜서였던 내게 그런 것까지 시원하게 내어줄 수 있는 방송국들이 그리 많지 않을테니까. 좀 더 굽신거리고 좀 더 사정해야 겨우 받는 그 기분... 정말... 휴. 

 

어찌어찌 그래도 다 준비가 됐다. 오늘 서류를 접수하러 간다. 응시 마지막 날이기도 하고. 만약 여기에 합격을 한다면 또 창원으로 왔다갔다 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텐데, 남편은 이제야 그게 걱정이 됐는지 '합격하면 어쩌지?' '진짜 할거야?' 라고 말을 해서 아주 욕을 찰지게 해줬다. 

 

"당신이 하라며... 열심히 해보라며!!!!! 사람이 어찌 그리 충동적이야? 감정에 복받쳐서 꺼낸 말이었어? 시동을 건게 누군데, 부스터를 누가 달았냐고~ 근데 이제와서 셋째 걱정을 안한다 잔소리야? 뭐 이렇게 사람이 냄비뚜껑만도 못해?! 엉? 마음먹기가 쉬운 줄 알아? 왜 지금에 와서 초를 치냐고!!!!!!"   

 

사실, 남편은 핑계고, 나는, 나의 역량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늘 고민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있고, 해볼 수 있는 일이라면 죽이되고 밥이되든 해보고야 마는 성격. 이게이게 문제다. 오늘 글의 주제는 저런 내 고질병. 일명 '도전병'ㅋㅋㅋ 테스트 하고 도전해서 넘어지고 깨지고 그러다가 다시 일어서고 그러다가 고개 하나를 넘고 또 넘고... 

 

제작년 '경남도립극단 상임단원' 모집 공고 이후 이렇게 빡세게 준비해보긴 참 오랜만이다. 그 때... 면접보고 나와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오랜만에 뭘 너무 열심히 해본 내가 예뻐서... 너무 자랑스러워서... 자기애에 취해 펑펑 울었었는데ㅎㅎㅎ 이번엔 조금 더 어른스러워졌겠지. 울지 않겠어.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았으니까. 피터지는 프리랜서 삶에서 항상 멈추지 않았으니까. 

 

아, 배고파. 우유라도 한잔 먹고 서류 점검해봐야겠다.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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