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피지기

어차피 비정규직

어진백작 2021. 8. 14. 01:40

 

밤 10시가 안되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인사과에서 필요서류를 보강해달라는 요청을 받은지 3시간 만이었다. 아이들은 남편에게 맡겨놓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속도를 붙여 부지런히 해야 끝낼 수 있는 양이었다. 쉬지 않고 타자를 두드렸고, 아이들을 재우다가 잠이든 남편이 방문을 열었다. 

 

"다 했어?" 

"응, 다했어."

 

새벽 3시 30분을 조금 넘긴 시각, 6시간을 꼬박 저것(?)을 만드느라 생 노가다를 했다. 

 

"구분, 숫자만 좀 챙겨줘. 눈 좀 붙일께." 

"응."

 

처음 보강 요청을 받았을 때 머리가 하얬었다. 부지런히 원고와 큐시트를 챙긴 것 같았는데, 폴더가 사라졌던 것. 공용메일을 뒤질까, 같이 일하던 작가들한테 이리저리 연락을 하고 물었다. 그 어디에도 내가 쓴 원고와 큐시트는 없었다. 내가 챙기지 않으면 그 아무도 보관하지 않는 종이에 불과했다. 

 

식은 땀이 흐르고 멘붕을 느끼지 시작한지 1시간 쯤 흘렀을까. 내가 사용한 USB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게 사라질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모든 폴더를 하나하나 열어보기 시작. 도대체 누가 여기에 옮겨놨는지 (아마도 나였겠지만) '가계부' 폴더에 버젓이 들어있던 <MBC 경남>..... 저, 애증의 프로그램. 아휴. 살았다....

 

거의 모든 큐시트와 원고가 들어있던 소중한 폴더. 2018년 4월부터 2020년 5월까지 하나하나 열어서 목록을 복사해서 옮기고 칸을 채워나갔다. 나중에는 손이 자동으로 움직이더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남편이 방문을 열 때까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역시, 인간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 글자 오타하나 용서하지 않고 집중에 집중을 더했다. 

 

 

내가 이 말도 안되는 생 노가다를 한 이유는 따로 있다. 내 경력증명서에는 내가 한 업무를 상세히 기록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보험자격득실 내역에도 없는 내 경력, 비정규직의 서러움은 여기저기 묻어있다. 건강보험자격득실 확인서에 내 이름과 직장 이름이 들어있기만 했어도 (4대 보험 적용이 안되는 비정규직은 어림도 없는 것) 이 노가다는 필요가 없었다. <구성 및 원고 작성> 이 몇 자만으로도 충분했을 경력을 저렇게 증명해야만 겨우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력증명서'라는 타이틀로 뽑아지지도 않는다. 용역제공확인서, 근무사실확인서라는 이름으로 시작한다. 프리랜서이기에 회사 대표 직인은 절대 찍을 수 없다고 했다. 심지어 출근하고 퇴근을 했지만 근무시간조차 입력할 수 없단다. 그 이유가 모두 비정규직이었기 때문에, 프리랜서였기 때문이라고 선을 그었다. 망할놈의 방송국은 그렇다.

 

일할 땐 같은 노동자, 증명할 땐 나몰라라, 바로 이런 식이다. 

 

KBS 방송국엔 아이 셋을 팔고, 남편의 외벌이를 팔아 서러운 나의 위치를 설명했다. 주 몇시간 근무 를 명시하기 위한 구걸이나 다름없었다. 국장급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고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 했다. 결국 장담할 수 없다는 얘기. 응시 안내문에는 버젓이 적혀 있다. '주 땡땡 시간 근무'가 적혀있지 않은 건 인정할 수 없다 라고. 

 

내가 일했던 경력을 인정받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 구나 라는 좌절감과 패배감에 최근 3일 동안 내 마음은 아주 많이 쓰라렸고, 밤을 새워 작성한 엑셀파일과 굽신거려 이거라도 주십쇼 해서 받은 종이 한 장을 담당 직원에게 보내고 될 대로 되라 손을 놓았다. 

 

남편이 말했다. "원래 제도권 밖에 있다가 제도권 안에 들어가기란 힘든거야." 

 

프리랜서, 비정규직. 내 직업에 굉장히 자부심이 있었는데, 저 두 단어가 오늘은 꼴도 뵈기 싫다.

 

서류에서 탈락되면 그건 내가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가 프리랜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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